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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13 비오는 날 8
  2. 2009.02.04 기쁘다 샤빙님 오셨네~! 10
  3. 2009.02.03 W ㅡ 짧고도 오래 기억될 그들의 기록 2
  4. 2009.01.26 H2, 박노해, 구미, 여행. 6
  5. 2009.01.13 Periskop & 이승환 - Realistic. 6

비오는 날









대나무와 하늬바람이 만나면 소낙비가 된다.

소나무와 비와 바람이 만나면 파도가 되고,

바람이 거세지면 파도가 바위에 부딪친다.

플라타너스에 내리쬐는 햇살과 산들바람은 연못 아랫 세상을 만든다.

우리가 신뢰하는 지각조차도 선입관에 갖혀있어,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보지 못하게 할 때가 있다.


있는 그대로를 듣고 볼 때, 자연은 오묘히 아름답다.

더 많은 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소금 사막에 비가 내리면 어떤 소리가 날까.

산타바바라와 안달루시아에는 어떤 소리가 날까.

아, 여행 고파라.






 
    비가 내리고 밖은 어둡고, 몸은 아픈데 학교는 조용해서 역설적으로 마음은 고취되는 오늘같은 날에 들을 노래가 '아톰북' 밖에 없다는 걸 오늘에야 알았다.

    '축구왕 피구'님 블로그에서 처음 추천을 받았을 때부터 듣고 싶었던 음악이었는데, 처음 들었을 때는 좀 미지근했다. 그럴 만 한 게, 같이 주문해서 들었던 노래들이 My aunt mary, 검정치마와 같이 뿅뿅거리는 우주행 멜로디들을 자랑하는 놈들이었다. 아톰북은 미지근했지, 암.

    그런데 오늘은 내 엠피에서 들을 만한 노래가 아무리 뒤지고 뒤져도 아톰북 밖에 없더라. 그래서, 아톰북은 처음으로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리고 신나게 소리지르고 지지고 볶아대는 밴드에게 앞으로 나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란 어떤 사람인지.

(아톰북 노래를 같이 들어보고 싶으나, 저작권법이 무서우므로 패스. 듣고 싶은 사람은 컨택트 미.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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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다 샤빙님 오셨네~!







    한 달 내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르샤빈님이 오셨다. ㅠㅠ

    거상 벵거와 거상을 따라하려는 잡상 제니트, 그리고 그 사이에 껴서 이도저도 못하고 결국은 자기 돈 몇십억 날려버린 아르샤빈. 이적료는 비공개지만, 아르샤빈이 본인 부담하는 금액을 포함해서 16.5M 유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급도 제니트에서 받던 수준에서 대폭 삭감하여 세후 50,000 파운드 정도에 완료되었다고 한다. 백넘버는 23번. 흘렙의 더러운 13번을 이어받지 않아 조금 다행? ㅋㅋ

    뭐 이런 건 원래 내 관심 밖이고, 아스날에 오고 싶어서 자신의 주급을 삭감하고 이적료의 일부를 자신이 내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왔다는 그 충정! (제니트에게는 충정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ㅋㅋ 관심없음) 아무튼 아르샤빈 완소다! ㅋㅋㅋ

    난 원래 '불'같은 선수들을 좋아한다. 경기에서 자신을 불사지르고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하는. 사실 플라미니가 밀란으로 가고 세스크의 체력이 너덜너덜해졌을 무렵부터 아스날에는 그런 선수가 없었다. 한 팀에 그런 선수들이 적어도 한둘은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드디어 아스날표 불꽃 남자 아르샤빈이 왔으니!! 아르샤빈은 진짜 좀 짱이다. 아르샤빈이 경기와 시즌에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버리는 타입이라, 너무 쉽게 쇠락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니!

    아르샤빈은 과거 융베리의 스타일과 흡사하나 테크닉은 그 이상으로 보인다. 피레스의 헤어스타일을 한 융베리랄까. (아, 이건 좀 토쏠린다.) 공격을 제외하곤 수비와 미들이 모두 붕괴된 아스날에 진짜 가뭄에 단비 같은 아르샤빈. 아르샤빈이 합류함으로써 에버튼에게조차 캐발리던 미들 장악력이 조금은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미들 장악력을 높이기 위해선 압박하고 태클하는 거친 중앙 미들이 있는게 효과적이지만, 아스날엔 없으므로(!!) 이런 파괴적인 윙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볼 소유시에는 공격을 매끄럽게 진행시킬 수 있고 볼을 소유하지 못할 시에는 역습의 파괴력을 더할 수 있다.

    조금 우려가 있다면, 아르샤빈의 본 포지션은 포워드에 가까운 세컨탑 혹은 윙포워드이기 때문에 아스날의 측면 미들을 잘 소화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물론 아르샤빈은 '정력왕' 스타일 이기 때문에 수비도 죽어라 열심히 할 게 분명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수비력과 미들진의 밸런스에 의문이 간다. 그래도 이번 겨울에 아르샤빈보다 뛰어난 기량을 보여줄 수 있는 매물은 전 포지션을 통틀어 전무했다는 점에서 매우 반가운 이적! 다른 이적생들에 비해 거의 월등한 포스를 자랑하는 아르샤빈이다. ㅋㅋ





    아르샤빈까지 온 판국에 가장 이상적인 포메이션은 4-3-3 혹은 4-5-1인 듯 하다.

--------------갓---------------
----샤빙----------로빈---------
------------슬희---------------
---------닐손-----송----------
-------------포백-------------
-------------무냐-------------

    요런 식으로 서주는 게 현재 아스날에는 가장 이상적이다. 로빈은 새컨탑과 윙포의 중간적 위치에서 프리롤로 움직여주고(사실 4-4-2를 쓰는 요즘에도 이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요즘 버전에서 갓과 로빈이 측면으로 빠져주는 빈도를 늘인다면 위의 포메이션의 활용법이 되겠다.) 아르샤빈은 전형적인 윙포 스타일로 움직여주면 파괴적인 쓰리톱이 구성된다. 거기에 안그래도 후달리는 우리 미들진과 공미 위치에 서면 날아다니는 슬희를 고려해서 3미들을 구성해주면 된다. 닐손과 송은 같이 수비와 공격 지원을 전담해주면서, 측면의 클리쉬와 사냐가 가질 부담을 덜어주면 된다. 이런 포메이션을 쓰면, 앞으로 복귀할 세스크, 로사, 두두, 월콧, 디아비 등도 충분히 자신의 원래 포지션(!!)에서 공존할 수 있다. 월콧이 아르샤빈과 로테이션, 로사와 디아비가 나스리와 로테이션, 세스크가 데닐손과 로테이션, 벨라와 두두가 로빈과 로테이션, 벤트너가 갓과 로테이션 해주면 된다.

    하지만 현실은 4-4-2 광신도 벵거. 아르샤빈을 턱하니 측면 미드필더로 써먹을 게 십중 팔구다. ㅠㅠ 디아비 부상으로 인해 이번 북런던더비도 눈물의 닌텐도DS라인 확정!!

    어쨌든 반갑다, 아르샤빈!!!! 내가 유로2008 네덜란드vs러시아전 보면서 하악대던 게 자꾸 생각난다. ㅠㅠ 이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바로 그 경기! 그때 아르샤빈이 아스날에 오는 꿈만 꾸고, 그냥 바로 포기했던 생각이 나는데. 진짜 오다니. 08/09시즌 최악의 부진이 이렇게 약이 될지 몰랐다.

    이제 반전만 남았다. 맨유의 기세를 보면 사실 3연패는 따논 당상으로 보인다. 맨유가 한 경기를 덜 치루고도 아스날과 10점 차이. 일단 우승은 물건너 갔고, 이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줄 일만 남았다.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빌라 따위는, 쳇. 2~4위로 마치더라도 후반기에서 멋진 경기를 보여준다면 구너도 전반기의 똥같은 경기를 관람한 보상을 받겠고, (몇 년째 계속되는 일이긴 하지만ㅠ) 09/10 시즌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샤빈, 진짜 내 스타일이다!! (실제로 에펨하면 뭔팀을 하든 아르샤빈부터 사놓고 보는.) 아스날 이적 후 첫 인터뷰에서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을 하랬더니...

Trust me, and Trust Arsenal.


    야, 이렇게 초장부터 멋있어도 되냐....이번 시즌은 너만 믿고 간다!!!


    덧) 50% 세일이라는 아르샤빈 어웨이 레플. ㅋㅋㅋㅋㅋ 이거 질러야 하나. ㅋㅋㅋㅋ





W ㅡ 짧고도 오래 기억될 그들의 기록

 


   「세계를 보는 새로운 창 W (이하 W)」를 마침내 읽었다. 꼭 보고 싶었는데 사자니 조금 아깝고 해서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빌려보았다. (왜 사기엔 아까웠는지, 그 이유는 커밍 순.)

    TV 프로그램을 활자물로 출판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고등학교 때 '역사 스페셜' 시리즈를 통해서 그런 류의 책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상당히 알찬 구성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는 EBS의 '지식채널 e' 시리즈를 모아 찍어낸 「지식e」시리즈를 읽었다. 이 책은 5분짜리 영상에 따뜻한 감성과 영상미를 담으려고 했던 TV 프로그램의 의도와 그 장점을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에서는 방송에서 소개되지 못한 관련 배경 지식도 소개되어서 유익하게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W의 장점은 본래의 프로그램이 가지는 탁월함에 기인한다. W는 '지역에서 활동하나 세계적으로 사고하는' 세계시민사회적 마인드를 바탕에 깔고 세계 각국의 사회 현상들을 현장감있게 전달한다. (계속 쓰면서 단어들이 좀 어색한데, 사실 아르샤빈의 아스날 이적 문제때문에 잠을 잘 못자서 단어들이 조합도 안되고 생각도 안난다. ㅠ 그깟 공놀이 ㅠ) 그 내용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제작팀이 책 서두에서 밝히듯이 앉아서 책 뒤지고 인터넷 뒤져서 '~이러이러하다더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내용이든지 발로 뛰어서 직접 보고 들은 그대로를 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W의 내용들은 살아있다. 좀 더 관용적으로 표현하자면 생생하다. 여기서 각주달고 저기서 편집하고 이리저리 헤지고 터진 내용이 아니라 그 사회의 '팩트(fact)'를 사실적으로 전달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W의 장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TV 프로그램의 영상에서 보여지는 생생한 현장감은 책에서 상당 부분 상실된다. 방송이나 다름없이 책에서도 생생한 사실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현장감의 전달에 있어서 TV프로그램에 훨씬 뒤떨어진다. 현장성을 주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도 아니고 영상캡쳐도 아닌 무언가들은 오히려 독서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책을 읽다보면 어떤 내용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지는데 그 '무언가들'은 그런 호기심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무언가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갈증에 콜라를 마신 것처럼 더 목이 타는 느낌이다. 또한 그 '무언가들'이 등장하는 빈도는 일반적인 책에 비해서 잦고 어떤 것들은 한 페이지를 다 잡아먹을만큼 크기도 커서, 활자를 읽는 진행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게 되어버린 셈인데, 내가 예전에 봤던 이런 류의 책들과 비교해보면 그 단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선 '역사스페셜' 시리즈는 본래 영상보다는 텍스트(콘텐츠? '다루는 내용'에 정확한 대응이 되는 단어를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서 텍스트는 '영상 텍스트'를 포함한 창작물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서술되는 내용만을 뜻한다.)에 비중이 큰 TV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책에서도 영상보다는 텍스트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읽다보면 이 책이 원래 TV 프로그램이었다는 생각을 잊을 정도로 내용에 충실했다. 

    또한 '지식e' 시리즈는 책에서 텍스트 자체보다는 원래의 영상이 가지는 느낌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했다. 지식채널e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귀기울이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작팀이 언급했듯이 '영상시'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또한 한 챕터의 전반부에서는 방송의 영상을 절묘하게 책에 표현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내용과 관련된 배경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상과 텍스트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한다. 이런 책들에 비하면 W는 TV 프로그램의 영상과 텍스트를 책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TV 프로그램의 텍스트를 더 보충해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든지, 아니면 방송의 영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중점을 뒀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W라는 책이 가지는 가치의 '일회성'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W는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해외의 사회 현상들을 가장 발빠르게 전한 책이다. 때문에 W는 가장 시사적인 동시에 그만큼 일회적이다. 누군가가 2, 3년 뒤에 이 책을 처음 본다고 가정하면, W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내가 느꼈던 것처럼 '책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2, 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다면 W가 전하는 현상들은 그 시의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W가 전하는 내용들을 다른 매체나 저작물에서 활용한다면, 2, 3년 뒤의 독자가 본 W는 여기저기서 들어본 내용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W는 다른 일반 책들에 비해서, 심지어 TV 프로그램을 각색한 '역사 스페셜' 시리즈와 '지식e' 시리즈에 비해서도 수명이 짧은 것으로 보인다 . TV 프로그램이 계속 되는 동안 2편, 3편이 나와서 W의 손자뻘이 출판되더라도 그 '일회성'의 문제는 여전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사지 않은 이유다. 두 번 볼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TV 프로그램을 또 보면 또 봤지.)

    하지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W는 좋은 책이다. 1) 무거운 내용이지만 쉽게 읽히고 2) 따뜻한 마음을 기르게 하고 3) 사회적 고민의 시작점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W의 시사성에 한계가 있더라도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하여 더 고민하고 더 조사해본다면 그 문제의식은 일회성에서 탈피된다.

    결정적으로, 가깝고 먼 미래에 W에서 소개하는 사회 현상들의 외면적 양상은 바뀌어 있을지라도 내적인 갈등 구조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또한 그 갈등 구조는 또 다른 현상에서 재현될 것이다. 예를 들어 W에서 다뤘던 각 국의 도시 빈민 문제와 절대 빈곤 문제는 몇 십년 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해결이 요원한 문제이다. W에서 소개한 바로 그 나라가 아니라 그 옆 나라에서 또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이라크 난민 문제 역시 아빠 부시가 전쟁을 일으킬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이며, 난민 사이의 계급 격차는 H.G.웰즈의 소설「타임머신」에서 묘사된 미래 세계를 연상시킨다. 해맑게 웃으며 고통을 모르는 지상의 인간과 힘겹게 노동하고 고통받는 지하의 인간. 1895년에 쓰여진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은 이라크 난민들의 모습, 그리고 더 크게는 전지구의 인간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흡사하다. 갈등 구조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반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나니 마치 결론이, 내용은 좋은데 책에선 잘 전달하지는 못하니, 닥치고 본방이나 사수하라 - 이런 말인 것처럼 들린다. 맞다. (ㅋㅋ) 그래도 책보다는 TV 프로그램의 전달 효과가 더 커보이니 가급적이면 본방 혹은 재방 혹은 검은 경로의 무언가를 보면 좋겠고, 시간과 장소 등 여러 여건이 충족치 못하여 프로그램을 자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해본다.




    덧) 이 책과 연관시켜 읽어볼 만한 책은 쉐일라 코로넬 外 지음의 「The News: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9」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의「르몽드 세계사: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지구적 이슈와 쟁점들」이 있다.

    '더 뉴스'는 9명의 아시아 기자들이 쓴 아시아의 중요한 9가지 사건들을 엮은 책이다. 지금은 MB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KBS TV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에서 소개된 바 있다. 우리는 국내의 문제 혹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을 통해서 아시아의 저널리즘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르몽드 세계사'는 104개의 핵심 키워드를 추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지구적 문제를 심층적, 균형적으로 전달한다. 국제 문제에 대한 백과사전 혹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줬던 '사회과 부도' 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하나의 키워드에 대하여 여러가지 표와 그림을 제시하여 설명한다. 여기 저기서 글을 쓰는 데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 다만, 가격(정가 25,000원)이 조금 압박이다. 


    뭔가 설명이 틀에 박힌 것 같고 명확하지 못하다고?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ㅋㅋ) 지금 읽고 있는 가벼운 소설 하나만 읽고 나면, 이어서 볼 예정이다. 아마 다음 책 관련 포스팅은 W와 '더 뉴스'의 내용을 비교하여 써볼 것 같다. 그 글에서는 형식과 기술 방법을 주로 이야기하는 이 글과는 다르게 W의 내용에서 보이는 아쉬움을 좀 다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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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박노해, 구미, 여행.


1




시합은 몇 번이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설령 졌다해도 시합은 하나만이 아니야.
이제부터 수많은 시합을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돼.

연애만이 아니야.
일, 병, 인간관계..
싸워야할 상대도 여러 가지야.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하고, 울기도하고, 웃기도하고,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연전 연승으로 죽을때까지 웃기만 하는
그런 인생을 바라나...

- 아다치 미츠루, H2 12권 중에. 


2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

박 노 해



돌아보면

내 인생은 실패투성이


이제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

두번째 화살은 맞지 않겠다고

조용히 울며 다짐하다가


아니야

지금의 난

실패로 만들어진 나인데

실패한 꿈을 밀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에게 실패보다 더 무서운건

의미없는 성공이고

익숙한 것에 머무름이고 실패가 두려워 도사리는 것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지않는다.

성공했지만 의미 없는 것들이 있고

비록 실패했지만 더 의미있는 것도 있다.

누군가는 의미있는 실패라도 하며 쓰러져야만

그 쓰라림을 딛고 넘어 새날은 온다.


이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준비에 실패함으로

실패를 준비하지 말고

실패를 정직하게 성찰하며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



3


    난 얼마나 이기고 싶어했는지, 이기려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패배와 실패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패배와 실패는 정확히 따져보면 다른 뜻이지만 삶에서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자기 자신과 싸워서 패배한 것이 바로 실패이기 때문에.) 박노해의 시를 보며 가슴 깊이 반성해본다.

    저 시를 본 뒤에 난 친구들을 만났고, (시에서 이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반 농담삼아 '뭐든지 져주겠다'며 나섰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보니, 져주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주장이 관철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 즐거웠는데, 내가 먼저 져주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계속 얘기를 하면서 반성할 부분이 있었는데, 난 '모든 걸 져주겠다'는 마인드로 말하면서도 툭하면 이기려고 했던 것. 그러다가도 '아, 내가 이러면 안되지'라는 마음에 말을 접곤 했다.

    '의미없는 성공'과 '익숙한 것에 머무름이고 실패에 도사리는 것'. 내 삶을 되살펴보면 '의미없는 성공'에 만족하기 위해 얼마나 몸을 사렸는지 모른다. 나에게는 큰 실패없이 지금껏 인생을 살아온 게 만족스러운 점 혹은 일종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런 태도 자체가 나의 미래를 발목잡아 온 듯 하다. '이건 돈이 없어서 안돼. 혹시나 지원이 안되면 안되잖아?', '이건 재능이 없어서 안돼. 욕먹기 싫잖아.', '이건 실패 가능성이 너무 커.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래서 저 시를 읽고 조금씩 내 삶을 바꿔가고 있다. 까짓거 계획대로 안되고, 퇴짜 좀 맞고, 좀 떨어지면 어때. H2에서 나오듯이 연전연승도 안될 일이지만, 또 그렇다고 인생에 연전연패도 없거든. 인생은 초등학교 때처럼 100점을 맞지 못하면 뭔가 마음이 찝찝한 받아쓰기같은 게 아니니까. 10점을 맞아도 나 스스로 만족하면,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모 기업의 CF에서 나오는 훈이처럼, 엄마한테 5개 틀린 시험지를 내밀면서도 "나 잘했지?"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4


    친구를 보러 구미에 갔다.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갔는데, 하루가 지나 그 다음날 집으로 가며 생각해보니 정말 '멋진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여행'이라 단정짓지 않았지만 '여행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느낌이랄까. 덕분에 생소한 곳에서 나를 낯설게 만들 수 있었다. 알기 어려웠던 '나'를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죽어라 걷고 혹은 굉장한 속보로 걷고(ㅋㅋ), 구미 여기저기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뉴-뉴욕의 전망에 조금 놀랐다가 친구의 아픔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늘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과 눈내리는 금오산에 경외감을 느끼며, 금오산 비 앞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사진을 찍을 수 없음에 조금 안타까워 했지만 폰카에 친구들 사진은 하나 남아있고, 구미 사람들의 이상한 사상을 체험하고, 박정희의 거룩한 흔적들을 엿보았고(ㅋㅋ), 오랜만에 기차 바깥의 풍경을 즐겼고, 약을 먹지 않아도 아프지 않았고, 엄마 보고싶고. (ㅋㅋ)

    귀차니즘과 게으른 내 성격 탓에 여행을 조금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이제는 여행을 좀 다녀야겠다. 사진을 잘 찍는 법도 좀 배워야 할 것 같고 평소에 걸어다니는 습관을 몸에 들여야겠다. 꼭 해외가 아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우리나라 곳곳이 너무 궁금해졌다. 올초의 약속처럼 사람을 더 사랑해야겠고 혼자서 가기로 계획했던 여행들은 취소하고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여행을 다니고프다. 

    내일은 몇 년 만에 가족 여행. 영덕으로 간다. 이히.


5

    이제 진짜 새해다. 아직 음력으로 안지났다고 새해가 아니라는 안일한 합리화를 할 수도 없다. 빼도 박도 못하게 새 해가 다가왔으니, 나도 새롭게 태어나야겠지. 새로운 실패를 해야겠지.

    이 블로그를 들러주신 분들도 다들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바랄께요. 부디 '희망'만은 잃지 마시어 지옥같은 이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길. 

  
May the for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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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iskop & 이승환 - Realistic.

 
   보통 미서방의 글 제목에는 가져오는 글의 지은이와 제목을 적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외의 경우인데, 지은이가 두 명이고 제목은 내 마음대로 붙였다. 왜냐하면 하나로 엮어 읽을만한 두 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두 글의 교집합은 글 제목대로 'Realistic'이다.

    'Realistic'하면 딱 무엇부터 떠오르는가. (1초, 2초, 3초.) 내 경우에는 체 게바라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내가 아주 좋아하는 문장 중 하나인데, 단순히 멋있어보여서 좋아하는 건 아니다. 삶의 방향성에 대하여 스스로 생각하다보니 어떠한 결론이 도출되었고, 그 결론은 사실 이 문장과 맞닿아 있었다. <블로그의 처음에 서서> 라는 글에서 그 사고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두 글은 바로 체 게바라, 그리고 문제의 이 문장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 글은 이 문장의 '진위 여부'에 주목한다. 정말로 체 게바라는 저런 말을 했을까. 흡사 '역사 추적'이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의 추리를 따라가보자. 그리고 두 번째 글은 이 문장의 뜻이 사회에서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가를 다룬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ㅡ 라는 말은 현실을 우선시하는 '현실주의자'가 되자는 뜻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글에 포함되어 있으니 한 번 읽어보시라.

    (두 글이 다소 길고 복잡할 수 있으나, 꼼꼼이 정독하면 아주 재밌을 것이다. 미서방은 내 블로그에서 가장 아끼는 글방이므로, 차라리 글 읽기가 힘들 것 같으면 아예 스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꼼꼼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대강대강 읽는 건 사절!)


    일단 연이어서 한 번 읽어보고, 이어서 'Realistic'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첫 번째 글은 Periskop 님의 <체 게바라는 과연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했을까?> 이다.

 

홈지기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명랑함을 선보이는 블로거 이웃 가운데 이승환 님이 있다. 간만에 이승환 님의 블로그에 가봤더니 재미있는 글이 올라와있었다. 흔히들 열혈 이상주의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에게 정신차리라고 할 때 자주 쓰이는 두 인용문에 대한 촌평이었다.

여기서 두 번째, 체 게바라가 말했다는 "리얼리스트가 되어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에 대한 홈지기의 기억을 덧붙여보기로 하겠다. 공교롭게도 홈지기는 이 말에 두 번 큰 충격을 먹었다. 첫 번째는 불꽃같이 뜨거운 삶의 숭고함에 대한 충격이었고, 두 번째는 세상은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의 필요성에 대한 충격이었다.

한국에서 체 게바라에 대해 사회적 관심도가 급상승한 것은 대략 2000년 경부터로 기억된다. 붉은 별이 박힌 베레모를 쓴 빨갱이의 표상(?)으로 여겨지던 그였으니, 그에 대한 뒤늦은 관심이 결코 이상할 것도 없으리라. 2000년 실천문학사에서 장 코르미에(Jean Cormier)의 『체 게바라 평전 (Che Guevara)』이 번역-출간되었을 때, 우리 사회의 반응은 예상 외로 뜨거웠었다. 인물 전기가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것부터가 국내 출판계의 화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체 게바라'의 이름을 단 책들이 여러 권 쏟아지고, 2004년 개봉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Diarios de motocicleta)"와 함께 한 번 더 세간의 이슈가 되었던 것을 떠올리면 그 파급력은 분명 상당했다. 심지어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테디셀러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Che Guevara

체 게바라와

Che Guevara: Biography

한국에서 유달리 히트친 체 게바라 평전

홈지기도 당시 체 게바라에 대해 궁금하던 차에 발간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읽어나갔다. 이 산적같이 보이는 사내가 편히 먹고 살 수 있는 의사의 길을 버리고 혁명가로 헌신했다니! 안락한 일상에 뒤통수를 치는 듯한 감상은 이 책 맨 앞머리에 나오고, 그리고 행여 잊어먹을까봐 역자 후기 맨 마지막까지 댓구로 반복되는 말로 절정에 올랐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이 때가 첫 번째 충격이었다. 그 여파로 홈지기는 이 문구를 프린트하여 책상머리에 꽤 오랫동안 붙여놨었다. 아마 다른 분들도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꽤나 있으시리라 짐작된다. 물론 홈지기는 그렇게 사상이나 의지가 투철(?)하지 못해서 저 종이는 꽤나 일찍 바래버리고 말았지만.

그렇게 바랜 종이에서 눈이 멀어진지도 몇 년이 지났을까. 3년 전쯤 어느날 홈지기는 그 문구를 보고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 저게 원어(에스파냐어)로는 뭘까? 홈지기는 2차 세계대전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며 체득한 버릇이 하나 있다. '번역을 믿지 말고, 원어를 구해라.' 독일군이나 소련군에 대한 지식을 영어나 일본어로 번역된 형태로 받아들이며 얼마나 많은 부분을 잘못 알게 되었는지 절절히 느낀 경험 때문이다. 저 멋진 말을 에스파냐어 원문으로 이해해야 뭔가 더 찡한 느낌을 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문제는 처음부터 발생했다. 일단 『체 게바라 평전』 어디에도 저 말의 출전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고 두리뭉실하게만 나오지 어느 저작이나 연설에서 나오는 말인지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 어쩔 수 없이 구글링과 문헌조사를 통해 저 말의 원문을 찾아 헤맬 수밖에. 홈지기는 에스파냐어를 잘 모르니 우선 영어부터 시작하는게 당연한 수순인데, 영어로 검색해도 일단 뭔가 정확하고 권위있는 소스가 잡히지 않았다. 대략 "Let's be realists, let's dream the impossible."이라고 쓰는 경우가 그래도 많은 것 같은데, 여기서도 이 말들이 실린 웹페이지나 신문기사, (심지어) 책 모두가 하나같이 출전이 나와있지 않았다. 영어권이라고 체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적지는 않을텐데 매우 이상한 대목이었다.

홈지기는 다음으로 realist와 impossible에 해당하는 에스파냐어, realistas와 imposible에 Che Guevara를 키워드로 엮어 다양한 검색을 해봤다. 보통 번역어보다 원어를 이용해 검색을 하다보면 그 결과는 균일해지는 경우가 보통이다. 원어일수록 사람들이 말 그대로 인용하기 마련이고, 번역을 거듭하면서 번역자의 자의적 해석이 들어가 변형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웬걸, 이 역시 수렴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Seamos realistas y hagamos lo imposible.,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Seamos realistas, pidamos lo imposible.,
Seamos realistas, exijamos lo imposible.,
……

리얼리스트가 되자는건 공통적인데, 그 다음 '불가능한 것'을 어떻게 하자는 건지가 중구난방이다. '가슴'이나 '꿈'이란 대목도 변변히 나오지 않고 심지어 문법적으로 틀린 말도 있다. 체 게바라가 에스파냐어로 남긴 말이라면 이런 문제가 발생할리가 만무하다. 어디서 다른 언어로 연설했거나 혹은 누군가가 전해듣고 다른 언어로 처음 세상에 알렸음이 분명했다.

그런 언어가 뭐가 있을까? 홈지기는 『체 게바라 평전』의 원어가 프랑스어라는 점에 착안하여 프랑스어로 조사의 초점을 옮겼다. 결과는 놀라웠다.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리얼리스트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Voila! 프랑스어에서는 이 말로 대부분이 수렴하고 있었다. (간혹 demander 대신에 유의어인 exiger가 쓰이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저 프랑스어 문구는 무엇이란 말인가? 아주 일부에서는 저게 체 게바라가 한 말이라고 쓰고 있으나, 역시 그 가운데 명확한 출전을 밝히고 있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가장 균일한 원문을 쏟아내는 프랑스어 문장도 출전이 변변히 없다니?

결국 저 말의 쓰임새를 몇 날 동안 살펴본 끝에 홈지기가 알아낸 것은 이거다 — 저 말은 그저 1968년 5월 파리 학생시위 당시 등장한 시위 슬로건 중의 하나였다.

May 1968 in Paris

당시 드골 정권에 반대하여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던 무렵, 파리 시내 곳곳에는 어지러운 정치 낙서와 함께 많은 슬로건이 등장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었고, 학생 및 대중의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러나 누가 처음 이 말을 지어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대중은 저게 누군가 멋진 명사의 말인 것처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오버랩된 인물의 하나가 '체 게바라'였을 것이다. 아시다시피 1968년 당시 체 게바라는 프랑스에서 좌익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Socialism and Man in Cuba (El Socialismo y El Hombre en Cuba)』같은 체 게바라의 글들을 보면, 그는 사회주의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 등을 언급하며 사회주의국가가 가질 수 있는 경직성에 대해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점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가 어디선가 저런 말을 남겼다는 풍설이 삽시간에 퍼졌고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되지 않았을까. 홈지기는 이후 이 슬로건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에스파냐어로, 한국어로 등등 의역되어 오늘날처럼 떠돌게 되었으리라 추측한다.

(이 추측이 옳다면, 위의 문장 해석을 다르게 해야할 수도 있다. '리얼리스트'가 아니라 그냥 "현실적이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 뜻이라면 당대 프랑스 정국에서 오히려 정권 퇴진의 극단적 해결책을 밀고 나가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가 보더라도 체 게바라의 삶과 잘 어울릴 법한 간지나는 저 말이, 실은 무명씨가 만들어낸 시위 슬로건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발견. 이것이 홈지기에게는 두 번째 충격이었다. 세상에 곧이 곧대로 믿을건 역시 없구나라는 생각이 쭈뼛하게 온 몸을 휩쓸었다. 나 스스로가 사르트르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칭송했다는 '체 게바라'의 이미지에 미혹되어 겉멋만을 탐닉했다는 자성이 밀려들었다. 아무리 열정이 세상을 휩쓸어도 냉정의 고삐는 놓지 말아야 하는 법인 것을.

이후로도 가끔 저 말을 검색해봤지만, 오늘날 적어도 책임 있는 프랑스 언론이나 기고문에서 저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를 인용하면서 '체 게바라의 말'이라고 하는걸 보지 못했다. 또한 Wikipedia의 자매 프로젝트인 Wikiquote를 보더라도 이 말은 68시위 당시 슬로건 페이지(영어판, 프랑스어판)에 아무런 원저자 명시 없이 있을 뿐이다. 반면 Wikiquote의 체 게바라 페이지(영어판, 프랑스어판, 에스파냐어판)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다. 이런 면을 보더라도 홈지기는 현재로서는 체 게바라가 리얼리스트가 되자는, 그리고 불가능한 꿈을 갖자는 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물론 체 게바라가 저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홈지기의 추론이 100% 맞으리란 보장은 없다. 독자분 중 누군가가 명확히 저 말이 체 게바라의 입에서 나왔다는 출전을 알려 주시면 오히려 속이 편할 것 같다. 그래주신다면 홈지기도 그간의 추론 과정을 삽질로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방문객 여러분들은 항상 캡콜님 말마따나 '백 투 더 소스'의 자세로 정보의 진위를 확인해보는 습관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체질화시켰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마 평소에 체 게바라, 그리고 저 문장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은 이 글을 읽고 적잖이 놀랐을 것이라고 예상해본다.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놀라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이어서 두 번째 글을 읽어보자. 

    두 번째 글은 이승환 님의 <체 게바라 두 번 죽이기> 이다.


아마도 요 근래 대학가에서 - 그것이 교수이든 학생이든 - 가장 유행하는 두 어구는 이게 아닐까 합니다.

1. 젊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이고, 나이 들어서도 마르크스주의자이면 더 바보 - 칼 포퍼(?)

2. 리얼리스트가 되어라,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 -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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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은 2번에 있으나 우선 1번부터 간단하게 평하겠습니다. 우선 (?)를 붙인 이유는 이 말이 굉장히 횡행하고 있는 데 반해 출처나 진위 여부를 분명히 밝힌 곳이 없다는 이유입니다. 사실 이런 일이 꽤 많습니다. 꽤나 이 시대를 휩쓴 시애틀 추장의 편지는 추장이 쓴 게 아닙니다. 1970년대 서구에서 나온 말이죠. 그것도 가이아 이론이 등장한 이후에 등장한 것이니 완전 서구 이론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역시나 열심히 퍼지고 있는 빌 게이츠가 했다는 조언도 구라임을 들풀님이 이야기한 적 있죠. 이런 이유로 이 이야기를 칼 포퍼가 했는지 조금 의문이지만 우선 사실이라는 가정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솔직히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우선 마르크스주의자, 막시스트라는 개념에 대해 포퍼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좀 더 곱씹어 볼 의미가 있습니다. 포퍼는 꽤나 엄밀한 과학을 추구하고자 했고 이 때문에 '반증'이라는 방법론을 내놓았습니다. 포퍼가 과학의 진보를 믿었는지는 좀 불투명하지만 여하튼 과학이 진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했으며 (쓸데 없이 관심 많은 분은 쿤/포퍼 논쟁 참고) 이 때문에 비과학적인 토대 (검증 불가능) 를 가진 이데올로기를 배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플라톤과 막스를 깐 이유도 여기에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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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자매품 시장경제와 그 적들을 집필하신 공병호 선생


그러나 포퍼가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했을지언정 마르크스 자체에 대해서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포퍼는 자신이 공격한 플라톤과 막스에 대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으로 이야기할만큼 존경을 표합니다. 그가 경계하는 주 대상은 'ism'이지 'Marx'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상이 엄밀하게 검토되기보다 교조적으로 흐르는 것은 계속해서 오류를 낳고 그것이 특히 설득력을 지녀 현실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경우 비극을 낳을 수 있음을 포퍼는 경고했던 것이죠. 여기서 마르크스 자신이 "그렇다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며 맹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리를 둔 사실을 떠올린다면 오히려 마르크스와 포퍼는 맞닿는 지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수행 교수의 은퇴 인터뷰에서도 이러한 부분을 일정 정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포퍼가 했다는 말은 종종 모르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미 상품화되고 상품화되어 최고의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한 체 게바라 선생이 내뱉은 말을 모르는 양반은 없을 겁니다. 유족은 그 상품화에 소송까지 걸며 고인의 삶에 반대되는 상품화에 맞서려 하고 있으나 최근은 아예 그의 죽음마저도 상품화되고 있을 정도죠. 그런데 이 말은 위 말보다 훨씬 괴상하게 해석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체 게바라가 어찌 돌아가셨습니까? 끝까지 가능성도 뭐만한 혁명 한 번 한답시고 깝죽대다가 총살로 이 세상과 굿바이 하셨죠. 그렇다면 '리얼리스트가 되어라'라는 그의 말과 그의 삶은 유리된 것일까요?

(주 : 채승병님이 이 발언도 체 게바라의 발언이 아니라는 좋은 글을 써 주셨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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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수령과 체 게바라는 매우 돈독한 사이...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주의자'라는 번역보다 더 자주 쓰이는 'realist'라는 표현은 사랑스러운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1. 실재론자 2. 사실주의자 3. 현실주의자, 이렇게 세 가지로 번역됩니다. 철학에서나 읊어 댈 실재론자는 제쳐둔다면 2번과 3번이 그 주된 쓰임새라 볼 수 있죠. 그런데 이 둘은 무지하게 대비되는 뜻입니다. 사실주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태도'를 의미하는 데 반해 현실주의는 '현실의 조건이나 상태를 인정하고 이에 따르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체 게바라의 삶과 성향을 볼 때 아마도 그의 발언은 전자, 즉 사실주의로의 리얼리즘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 사회에서 그저 현실주의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될 뿐입니다. 이 경우 두 해석은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가 '불가능한 꿈을 꾸고 끊임없이 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라'고 해석된다면 후자는 '불가능한 꿈을 꾸되 현실에 순응하라'가 됩니다. 전자가 극도로 혁명적이고 진취적이라면 후자는 애초에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주 : 호밀님의 지적에 따라 수정합니다. 제가 프레임 함정에 빠져 '현실주의'의 의미를 '현실순응주의'로 받아들인 것 같군요. 현실주의는 단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임을 의미하고 여기에 대해 순응하는가, 저항하는가는 차후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체 게바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개혁, 전복하라는 의미로 사용한 반면 사람들은 현실에 순응하라고 받아들인다고 보아야겠지요.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체 게바라의 삶을 존경한다고 말하고 이 말을 칭송하면서도 이상한 해석을 섞어 체 게바라를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여하튼 잡설이 길었는데 저는 자본에 반대되는 사상이 자본에 흡수되는 거야 뭐 당연하다고 봅니다. 흡수건 나발이건 결국 그러지 않고서는 사회에 메시지 자체가 알려질 수 없으니까요. 필요한 것은 그것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능력이지, 이에 대한 거부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 자체가 완전히 악용되는 것은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이가 재생산되는 과정이 자본의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계속되는 위기 속에 '자발적 복종'이 자리잡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서라는 건 영 찝찝하군요.



 

 
   
(이야기 마무리에 앞서 이 두 글을 꼼꼼이 정독해준 당신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우선 첫 번째 글에서는 사실주의적인 문제 의식을 바탕으로 체 게바라의 격언이 역사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스 68 혁명 때 존재했던 슬로건을 바탕으로 프랑스 저자에 의해 삽입되고 한국 번역가에 의해 확대해석된 일종의 '신화'임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참신함과 명료함은 글을 정독하신 분이라면 다 공감하실 것 같다. 중요한 건 체 게바라의 저 문구가 창조된 '신화'라 할지라도 그것이 수용자에게 유의미한 것이었다면 그 또한 가치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는 그 문장의 주인이 체 게바라가 아닌 68 혁명의 슬로건을 만든 아무개라 할지라도 그 역사적 의미와 시사성은 크다는 점이다.

    '현실을 직시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와 같은 시대인식이 없었다면 과연 68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인식은 썩을 대로 썩어있던 프랑스 사회를 가늠케한다. '가능한 수준'의 요구로는 구세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프랑스 전역의 대학생은 짱돌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러한 68혁명을 통해 프랑스 사회는 진일보 할 수 있었으며, 구세대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의 평준화된 국립 대학 제도 역시 68의 결과 가능했다. 현재 한국의 현실을 떠올려볼 때, 이 슬로건이 주는 의미는 체게바라의 격언 못지않게 크다.


    다음으로 두 번째 글에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인용되는 칼 포퍼의 격언이 사실무근 혹은 아전인수임을 밝히고 있다. 즉, 칼 포퍼의 격언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경고이지 결코 '마르크스'에 대한 경고가 아니다. 나아가서 체 게바라의 격언 역시 아전인수 격으로 회자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구체적으로 보면, 'realist'의 번역은 '사실주의' 혹은 '현실주의'인데 사람들은 오로지 '현실주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현실주의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뜻하며, 인식 후의 반응에 따라 '순응적 현실주의'와 '개혁적 현실주의'로 나뉘는데, 사람들은 아전인수 격으로 '순응적 현실주의'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체 게바라의 격언을 인용하는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 꿈은 가지긴 가지되 현실을 위해서는 접어둘 수 있는 거구나. 일단 현실을 인식하고 순응하는 게 중요한 거구나." 따위의. 하지만 그 격언의 참뜻은 절대 그러하지 않다. 이상과 꿈을 추구하더라도 철저한 현실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며, 또한 이상과 꿈의 실현이 현실 인식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 격언의 내포된 참뜻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블로그 첫 글을 쓰면서 이 블로그 이름의 원형은 "From the Vanilla Sky to the Vanilla Sky, Through the gray reality" 라고 했던 까닭이다. 체 게바라의 격언은 '순응적 현실주의'가 아닌 '개혁적 현실주의' 혹은 '개혁적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지금 글을 쓰면서 폼도 엉망이 되고 글도 늘어지고 중언부언해서 '그냥 글만 퍼올 걸, 뭐하러 사족은 달고 있냐'라는 생각이 자꾸 들지만 어쨌든 이 두 글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한 단어는 바로 'realistic'이다. 두 글은 'realistic'을 주제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realistic'한 방법으로 사고를 진행한다. 문(형식)과 질(내용)이 고르게 균형을 갖추어 공자가 무릎을 탁 치고 크게 칭찬할만한 글이다. 체게바라, 리얼리스트, 그리고 'realistic'에 관하여 '파격'을 선사한 두 글을 미서방에 추천한다.


    덧) 두 번째 글, 즉 이승환 님의 글과 관련하여,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구분' 문제에 대한 좋은 보충 의견으로 여겨지는 'intherye'님의 댓글을 첨부한다.


제가 보기엔- 사실주의와 현실주의가 서로 대비되는 비교 가능한 차원의 두 입장이라기보다는, 링크하신 곳에서도 드러나듯 쓰이는 곳이 다름(표현의 영역이냐 행동 및 사고가 기반하는 입장의 영역이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번역된 용어에 불과한 듯합니다.

사전에서 "그대로 인정" 운운한 것은 그 상태로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기보다는, 이를 테면 풍차를 거인이 아니라 그저 풍차로 본다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따르려는 태도라는 얘기도 사전에는 없네요.)

따라서 "현실주의"를 주어진 현실을 그저 인정하고 따르려는 입장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불가능한 꿈을 품고 주어진 현실을 크게 바꾸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나 생각이 몽상 아닌 현실에 굳건히 기반해 있다면 얼마든지 현실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기타 들고 꿈꾸자는 노래 부르는 대신 총을 들고 싸운다던가.)

즉, 현실주의자가 되자라고 번역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가장 옳은 번역이겠네요. 리얼리스트보다 된장 향기가 좀 덜나서 아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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