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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09 그리니치 천문대의 오래된 거짓말 6
  2. 2009.01.05 증여론 中
  3. 2009.01.01 Carpe Diem_
  4. 2008.07.29 '같이 밥이나 먹자' ㅡ 그 약속의 기술 7
  5. 2008.06.30 영화「블러디 선데이」를 통해본 6.29 유혈 사태 10

그리니치 천문대의 오래된 거짓말

 



"하움~ 분명히 난 방금 잠든 것 같은 기분인데, 벌써 아침이야?"
"일어나."
"벌써 8시간이 지났다구?"
"일어나."
"뭐야, 이거 말도 안돼!! 어ㅔㅁㄹ어ㅑㅐㅁ어푸페ㅐ뱌ㅓ걎댜걷베뎁ㄱㄷ, 으앙"


    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법한 일이다. 10분 정도 잔 것 같은데 몇 시간이 지났다니. 당신이 잠든 동안 누가 탁상시계의 시침을 돌려놓은 걸까? 집에 컴퓨터도, 휴대폰도 없다면 정답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당신을 음해하려는 누군가가 시침을 돌려놓았을 테고,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당신은 다시 단잠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요즘에 휴대폰, 컴퓨터는 생활 필수품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세계 표준 시계가 작동된다. 눈깜짝할 사이에 밤은 지났고 휴대폰 액정에는 "AM" 이라는 글자가 얄밉게 웃고있다. 힘겹게 준비를 한 뒤 직장이나 학교에 가면 '시간'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위 사람 전부의 탁상 시계가 망가지지 않은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바로 그 컴퓨터와 휴대폰 속의 '세계 표준 시계' 밖에 없다! 세계 표준 시계의 기준은 바로 그리니치 평균시. 영어로는 그뤼니취 민 타임, GMT. 바로 이 놈이 범인이었다.

    왜 그동안 '시간'이라는 체계 자체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믿을만한 게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 자신, 사랑, 돈, 주님, 친구, 부모님, 믿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 등등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겠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가장 믿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바로 지금 시간이 멈춰버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늙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지금으로부터 24시간이 지나도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 믿는 사람도 없다. 특히 현대의 '도시남, 도시녀'들은 시간의 맹신자 들이다. 하루 종일 시분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시간'이라는 기준에 절대적으로 따른다. 

   
"Time is Gold! oh nonono, Time is GOD!!" 



    여튼 그렇다면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도대체 뭔 짓이 벌어지길래 우리의 시간 체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일까. 천문대 관리자가 일상의 무료함에 지쳐 시간을 조정하고는 혼자 킥킥대다가 대나무 숲에 가서 '세계의 시간은 전부 다 거짓말이야'를 외치는 걸까? 아니면 천문대에서 일하는 소년에게 좋아하는 소녀가 생겨서 그녀를 만나지 않을 때에는 몰래 시간을 빨리 가게 하고, 그녀와 데이트 할 때는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스케쥴러 사업자가 그리니치 천문대 측에 거액의 로비를 해서 스케쥴러로 시간을 관리하지 않고서는 하루의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도록 빠르게 가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수면제 사업자와 수면 의학 관계자가 합동 로비를 벌여서 밤에는 시간이 미치도록 빨리 가도록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란 원래 항상 일정하지 않은 체계인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게 망상이란 말인가?!!!!
 
    (..사실 그렇다.)

   여튼 그러면 한 번 그리니치 천문대와 GMT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자. 분명히 그 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아래 내용은 위키 백과에서 '그리니치 천문대' '협정 세계시' 를 키워드로 검색한 결과를 참조했다.)


    그리니치 천문대(Royal Observatory, Greenwich)는 1675년세워진 영국천문대이며, 세워질 당시의 이름은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Royal Greenwich Observatory)였다고 한다. (무려 300년이 넘는 기간동안 뻥을 쳐왔다니!) 영국 천문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리니치 천문대를 위치 측정의 기준으로 삼아 왔고, 경도의 기준이 되는 본초 자오선은 1851년에 정해져서 1884년에 국제 회의를 통과했다고 한다. 

    자, 이야기가 지루해지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역시 얘네는 사기꾼이었다!!! (농으로 하는 말이니, 그리니치 천문대 측은 명예 훼손죄로 고소하지 마시길.)

    당시 그리니치 천문대에 위치하던 본초 자오선은 폐기되고, 현재는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하여 그곳에서 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새로운 본초 자오선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게다가 GMT 역시 1954년 이후에는 다른 천문대의 관측을 토대로 정해졌으며, 현재는 '협정 세계시'로 대체되었다는 사실! 그런데도 아직 협정 세계시를 GMT라는 용어로도 쓴다는 사실!! 그리고 원래 그리니치 천문대는 케임브리지로 옮겼고, 현재 그리니치에 번듯이 세워진 천문대는 런던 해사 박물관의 일부로 새로 세워진 건물이라는 사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움하하. 거짓말한 종목이 뭐든지 간에, 어쨌든 그동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단 말이다. 그것도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긴, 1600년대에 만들어진 천문대로 아직 세계 시간을 측정하고 있었다면, 우리 나라에선 그거 무시하고 첨성대로 측정해도 할 말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협정 세계시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분명히 그것말고도 아직 거짓말이 남아있을 것 같다. 분명, 시간은 잘못 흐르고 있을 테다!

    우선 협정 세계시란 약자로 UTC인데, 이 약자는 영어가 아니다. 협정 세계시를 약자로 하면 영어로는 CUT, 불어로는 TUC인데 서로 자기 것을 쓰자고 주장하다가 합의를 본 부분이다. 협정 세계시는 1972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국제 표준시로서, 1967년 국제도량형총회가 정한 세슘 원자의 진동수에 의거한 초의 길이가 그 기준이라고 한다. 

    자, 또 이야기가 지루해지니 본론으로 들어가자. 역시 얘네도 사기꾼이었다!!! 음하하.

    정 세계시는 그레고리력의 표기를 따라서 하루를 24시간,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눈다. 즉 하루에는 24 x 60 x 60 해서 86400 초인데, 실제 태양시(실제로 태양이 자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는 86400초보다 조금 길기 때문에, 협정 세계시에서는 때때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의 마지막 분을 61초로 계산한다고 한다. 즉 23시 59분 59초 다음에 0시 0분 0초가 되는 것이 아니라, 23시 59분 60초를 거쳐 0시 0분 0초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윤초(閏秒)라고 한다.

    역시 나는 한 해의 잉여된 1초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음이 판명된 것이다. (뭐래?) 

    그런데 윤초가 정말 가끔 발생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텐데, 좀 더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는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막상 2008년도 윤초가 있던 해였고, 1972년부터 지금까지 총 24번의 윤초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윤초가 없는 해보다 있는 해가 더 많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600년에 한번씩 1시간을 추가시키는 '윤시'를 만들자는 얘기조차 나온다고 한다.

   실제로 내년에 국제학술기구에서 이 안이 통과되면 윤초는 사라지고 윤시가 발생한단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태양시에 기초한 GMT가 UTC와 다른 시간 체계를 갖게 되어, 실상 의미없는 시간 체계가 된다고 한다! 영국은 GMT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우군이 없어 폐지될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한다.

   (위 내용은 세계 일보의 <그리니치 천문대의 '위기의 시간'>
이라는 기사에서 발견했다!)




    뭐 어쨌든 나의 탐정 스토리는 여기서 끝이다. 실제로 GMT(그리고 UTC는) 우리들이 모르게 시간을 속이고 있었고 난 2008년에 1초가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1초를 낭비해버렸다. (ㅋㅋ) 그리니치 천문대 역시 이제는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는 '관광 자원'이었으며, 조만간 GMT라는 용어는 역사책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란 것도 역시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이었으며 권력의 영향을 받는 현실의 산물이었다. 처음 GMT가 세계시가 된 것도 당시 대영제국의 헤게모니 덕분이었다면, 지금에 와서 UTC에 그 자리를 넘겨주는 것 역시 과학의 발달과 아울러 영국의 위상 하락에 따른 결과인 셈이다.  

    시간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하여 끌려다닐 필요도 없다. 그녀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느낀 1초는 하루만큼 길었고,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며 보낸 하루는 1초보다도 짧았다. 그렇게도 시간은 상대적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린 그 8시간의 단잠도 내 몸과 정신에는 하루 중에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을 테다. 힘겨운 하루와 '나 자신'을 화해시키느라 그렇게도 시간은 빨리 흘렀나 보다. 



    덧) 사실은 평소에 그리니치 천문대에 대한 의심이 들어서, 이것을 다빈치 코드같은 묘한 추리 소설 혹은 그리니치 천문대의 거짓말에 얽힌 연애 소설을 쓰고 싶었지만. 난 역시 글쟁이가 아니라서 그럴 엄두는 못 내겠다.

    덧2) 그래도 600년마다 한 시간씩 발생하는 '윤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다행이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머리 속에 나래나래 펼쳐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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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 中




p.80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약, 넥숨, 소송(actio)이라는 말의 기원인 '유사-범죄(quasi-delit)'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좀 더 분명히 이해된다. 단순히 물건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물건을 받은 자는 물건을 준 자에 대해서 유사 죄인의 상태, 정신적인 열등감, 도덕적으로 불평등한 상태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p.89-90

브라만법의 몇몇 원칙들인 기묘하게도 이미 설명한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그리고 아메리카의 몇 가지 관습과 유사하다.

(중략)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에도 화를 낼 만큼 귀족으로서의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마하바라타》의 두 절에서는 위대한 예언자들인 일곱 명의 왕과 사병들이 슈비(Cibi)왕의 아들의 육체를 먹으려고 할 정도로 기근에 빠져 있을 때에도, 샤이비아 브르사다르바 왕이 준 엄청난 선물과 훌륭한 무화과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오 왕이시여, 왕들로부터 받는 것이 처음에는 꿀처럼 달지만 마침내는 독이 됩니다.


이것은 증여로 인해 증여자와 수증자 간에 맺어지는 유대 관계가 대단히 강력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모든 체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것들보다 더 강하게 한쪽이 다른쪽에게 강하게 구속되는 것이다. 수증자는 증여자에게 종속된다. 이러한 이유로 브라만은 '받아서는' 안 되며 또한 왕에게 간청해서는 안 된다. 또 한편으로 왕의 입장에서는 주는 방식이 주는 사실 만큼이나 중요하다.

p.98   중국법.

(전략)
 
황 신부는 판 사람이 산 사람에게 넘겨주는 '애도증서(哀悼證書)' 모델들을 기록했다. 그것은 물건에 대한 추구권으로 사람에 대한 추구권과 섞여 있다. 즉 물건이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산이 되고 '취소할 수 없는' 계약의 모든 조건이 이행된 뒤에도 판 사람은 오랫동안 물건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비록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양도된 물건으로 맺어진 인연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약 당사자들은 영속적인 상호 의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p.99 쪽부터 이어지는 결론 전부.

p.110  2. 경제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결론 중에서

어떤 동일한 동기가 트로브리안드 섬의 추장,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 안다만 섬의 추장 등을 자극하고, 과거의 관대한 힌두인과 게르만족, 그리고 켈트족 귀족의 증여와 지출을 부추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인이나 은행가 또는 자본가의 냉정한 동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들 문명도 이익을 추구하지만 현대사회와는 방식이 다르다. 재산은, 지출하기 위해서,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충복'을 얻기 위해서 모은다. 한편 교환을 하지만, 교환의 대상물은 사치품이나 장식품 또는 의복이거나 즉시 소비되는 물건이나 향연을 베풂으로서 이루어진다. 받은 것 이상으로 갚지만, 이것은 처음의 증여자나 교환자를 압도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지연된 소비'로 인해 자신이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얻어내는 이익은 우리를 이끌어내는 것과 유사한 것에 불과하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북아메리카(동부와 대평원 지대) 사회의 하위 집단들 안에서 각각의 씨족 생활을 지배하는 비교적 무정형적이며 비타산적인 경제 체계와, 셈족과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된 이래 우리 사회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겪어온 전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고 개인주의적인 경제 체계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경제 제도와 경제적인 사건이 배열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기존의 이론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경제 합리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이라는 말은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그것은 부기 용어, 즉 장부에서 징수해야 할 임대료 맞은 편에 기재한 라틴어의 interest에서 유래했다. 아주 향락 추구적인 고대 도덕에서조차도 행복과 쾌락을 추구했던 것이지 물질적인 효용성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득(profit)과 개인(individu)이라는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고 원칙의 수준에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합리주의와 상업주의가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서양 사회가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적인 동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민중 속에서나 엘리트 사이에서도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지출은 관행처럼 시행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귀족계급들에게 남아 있는 풍습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즉 도덕적인 인간, 의무를 다하는 인간이 지난 시간의 인간이었고, 과학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이 앞으로 다가올 인간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같이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은 이 끊임없는 비정한 이해타산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중략)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성실하게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평생 동안 정당하게 보답을 받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는 것보다 일을 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다. 생산하는 교환자는 자신이 생산한 것과 노동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교환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간과 생명을 주고 있다고 다시 느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증여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에게 이러한 것을 보상해 주지 않으면 그는 일을 게을리할 것이며 이것은 생산성 저하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p.115-  3. 일반 사회학적, 도덕적 결론 중에서.

이것은 주제 이상의 것, 제도적인 요소 이상의 것, 복합적인 제도 이상의 것, 심지어는 종교나 법, 그리고 경제 등으로 나누어지는 제도적인 체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전체적인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고찰함으로써만 그 본질, 전체의 움직임, 살아 있는 부분, 사회와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상황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의식하는 순간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연구의 장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반성이다. 일반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사실들은 다행히도 여러 가지 제도나 그 제도들의 다양한 주제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성이라는 장점을 들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해 사회적인 실상 자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사회들은 현대 유럽 사회를 제외하면 모두 분절 사회들이다. (중략) 이러한 때에도 많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당한 기간, 우리 눈에는 미친 짓처럼 보이는 지나치게 후하고 기묘한 정신상태에서 서로 만났다. 

(중략)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둘러앉을 수만 있다면, 국민, 계급, 가족, 개인 등은 부유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행복인가를 찾기 위해서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주어진 평화 속에,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를 보완해 갈 수 있는 리듬이 있는 노동 속에, 또한 교육으로 가르치는 상호 간의 존중과 호혜적인 너그러움 속에서 축적되고 재분배되는 부 속에 있는 것이다.

<끝> 


Carpe Diem_

  
    새해 첫 꿈 이야기를 해보아야 겠다.

    꿈에서 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또는 3학년 여름방학 쯤이었던 것 같다. 많은 공부 거리와 방학 숙제에 치이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너무도 생생하고 현실적인 꿈이었다.) 방학 숙제는 서점에 있는 문제집 종류와 쓸만한 참고서 등을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하면서 귀찮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꿈속에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난 대학교를 다녔었던 것 같았다. 분명히 대학교를 다녔는데, 난 왜 고등학교 공부를 또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이 망할 놈의 수능 준비를 또 해야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서, 방학 숙제를 하고 같이 서점에서 나오던 친구들에게 "이거 꿈인 거 같아!!"라고 말했다.

    여기서 '꿈인 거 같다'는 게 자면서 꾸는 그런 꿈 말고, 내가 대학생으로 살았던 세계와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살고 있다던가 아니면 구운몽에서처럼 내가 진짜로 살고 있긴 한데 허상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으로 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다른 친구들은 별 반응이 없었는데 상현이가 늘 짓곤 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거 진짜 꿈일지도 모른다. 한 번 잘 생각해봐라." 고 말하였다. 상현이가 그렇게 말해줘서 일말의 희망이 생겼던 것 같다. 꿈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여전히 난 절망스러웠다. 또 이렇게 한 번 더 힘든 시기를 거쳐야 하는가, 라는 생각에 낙담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보다도 한 번 살았던 인생을 또 살아야 한다는 거 자체가 마음에 안들었던 것 같다. 평소에도 그런가? 인생을 또 살면 힘들 것 같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오면서 친구들이랑 시덥잖은 잡담을 하고는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난 너무 기분이 안 좋고 이 인생이 꿈인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울먹울먹거리며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엄마한테 갔다. 엄마한테 지금 이게 꿈인 것 같고 분명히 난 대학에 붙었는데 이렇게 또 공부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난 펑펑 울기 시작했다. 으엉, 으엉.

    그랬더니 엄마는 고개를 돌려 온화한 미소로 날 쳐다보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랬구나. 한 번 잘 생각해봐. 진짜 꿈일지도 모르잖아. 한 번 잘 생각해봐." 그래도 난 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엄마가 날 다독이며 또 말했다.
 
    "그 큰 형은 이제 군대 갔나?"

-

    그리고 난 잠에서 깰 수 있었다. 엄마가 말한 '그 큰 형'이란 경열이 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엄마는 내가 처음 학교 기숙사에 이사할 때 날 도와주었던 선배들 중에 경열이 형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 후에도 간간이 소식을 묻곤 했다. 나이도 많은데 학교에 남아있으면서 (내가 전해준 소식을 들어서) 운동을 한다는 걸 알고, 다른 선배, 동기들과는 좀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엄마가 그렇게 물어보는 순간, 난 경열이 형을 떠올리면서 내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잠에서 깬 것이다. 잠에서 깰 때 우리 엄마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모르는 듯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엄마는 위대하다.)

    꿈의 여운이 남아있어 찡그린 표정을 지으며 잠에서 깨고 나니, 난 내가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 순간인지 깨닫게 되었다. 꿈속에서 처럼 그때로 돌아간다면? 으...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지만, 분명히 꿈속의 난 (수능이야 어찌됐건) 또 한 번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인생은 단 한 번이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순간은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흘러올 미래도 아닌 것 같다. 가끔은 몇달 전의 언제로 돌아가면 내가 이런 이런 것들을 더 잘할 수 있었을텐데 ㅡ 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이 꿈을 꾸고 나니 그게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게다가 그렇게 된다면 내가 얼마나 괴로워할지 알게 된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난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ㅡ. 사실 매일 투덜투덜하고 있어도 지금처럼 행복한 순간이 앞으로 또 올 거라고 쉽게 말하지 못할 정도로, 소중한 지금이다.

    새해 첫날 이런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 하늘에 감사한다. (꿈을 꿀 때는 너무 괴로웠지만.) 하루하루를 정말 감사히 여기면서 올 한해도 즐겁게 보내야 겠다.

    Carpe Diem_!



'같이 밥이나 먹자' ㅡ 그 약속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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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와 얼굴본 지는 오래 됐고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고 싶을 때 보통 '같이 밥이나 먹자'라는 말을 애용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 같다. 만남의 약속에 다른 많은 일들도 있을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밥'일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1. 남녀노소 구분없이 '모두'가 하는 일이다.
2. 일과 중 반드시 해야 할 행위이다.
3. 가장 본질적인 행위를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4. 행위 도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5. 보통 식사 약속은 1시간~2시간 정도로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경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이 걸리는 행위이다.
6.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경우 양쪽이 만남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있다.
(7. 간혹 어떤 이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사를 혼자 하기 싫다는 이유로 밥 먹자는 약속을 잡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다. 별 생각없이 단순하게 하는 관습적인 행동 하나가 사실은 복잡하면서도 합리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밥이나 먹자'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을까? 위의 조건들을 고려하며 하나씩 생각해봤는데, 신통치 않은 것도 있고 그럭저럭 쓸만한 것도 있다.


1. 같이 잠이나 자자


     잠을 자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고 무조건 해야만 하는 행동이다. 또한 (수학여행, MT, 친구집 등지에서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같이 잠자리에 누웠을 때의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고해성사'을 위한 최적지이다. 서로 같이 누워있음으로써 본질적인 행위를 나누고 있기도 하며, 깜깜한 주위와 밤의 은밀한 분위기는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한다. 정말로 이런 약속을 잡는다면 내 집이나 상대방의 집에 저녁 혹은 밤부터 방문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기 이전의 시간도 유의미하게 보낼 수 있다. 여려모로 괜찮은 대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이 둘 이상이 눕기에 너무 좁거나 이성 간의 약속일 경우에는 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물론 이성이라도 공간 분할을 하고 잘 수 있겠지만, 그건 '같이 잠이나 자자'는 약속이 가지는 장점을 다 없애버리는 행동이다. 그래서 동성 친구 혹은 선/후배에게 자주 쓸만한 말이다. '야, 같이 잠이나 자자!'


2. 같이 돈이나 쓰자


    주위에서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같이 돈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한 조건 중 6번, 만남 그 자체로 즐거움을 동반하는 행위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돈 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거의 없다. 돈이 없어서 문제지.

    보통 친한 친구 간에 많이 발생하는 유형이고, 나아가서는 연인 사이의 데이트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데이트는 '밥이나 먹자'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돈이나 쓰자'이다. (사실 '돈이나 쓰자' 역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근본적인 목적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으나, 19세 미만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알아서 생각하자.)

    친한 친구나 연인과 같이 이런 약속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돈'이라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가 맞긴 맞나보다. 얼굴만 대강 아는 사람이랑 같이 '돈이나 쓰자'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3. 같이 똥이나 누자


    요즘 똥 홀릭에 빠진 내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밥이나 먹자'보다 훨씬 본질적인 행위를 나눈다는 점에서 임팩트가 아주 크다. '똥이나 누자'는 같이 뒷간에 앉아서 서로의 고통과 희열을 느끼며 서로가 가진 인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유의미한 행위이다.

    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다. 일단 장 트러블 혹은 복부 압박의 타이밍을 서로 맞추기가 어렵고, 행위 그 자체로서 '불쾌'하다. 더구나 성별이 다른 경우에 같은 장소에서 이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이루어지는 시간도 너무 짧다는 흠이 있다.

    그래도 '똥누는 약속'은 돈이 안 든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전부 다 돈이 필요한 행위였다면, 똥 누는 것은 깨끗하고 좋은 화장실을 물색하기만 하면 된다. 일종의 '반 자본주의적' 행태로서 자본주의에 심하게 반대하는 동지끼리 할 수 있는 상징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정말 친한 친구 간에도 가능하고, 이 행위가 한 번만 이루어지면 그 우애는 천금을 주고도 못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약속을 잡는 걸 아직 보거나 들은 적은 없다. 가끔 TV에 보면 '똥'을 누는 건 아니고 '화장실'을 약속의 장소로 잡는 경우도 있긴 하다. 특히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껌 좀 씹던 형님들이...


4. 같이 숨이나 쉬자


    이 방법도 내가 고안했다.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그 곳에서 말도 하지 않고 여타의 다른 행위 없이 같이 '숨만' 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아주 낭만적인 만남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의 호흡 만을 느끼며, 그 호흡 속에서 서로의 눈빛과 마음과 생각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방법 역시 돈이 안 든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선 이런 약속을 잡기에는 서울의 공기가 탁하다는 점이 우려스럽고, 정서가 불안하거나 다혈질인 사람이 아니라 차분한 성격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행여나 이런 약속을 잡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 둘을 미친 것으로 알거나, 아니면 둘의 성별과 관계없이 연애하는 것으로 이해할테니 웬만하면 인적이 드문 곳에 약속을 잡는 게 좋다.

    '같이 숨이나 쉬자'라는 말이 너무 낭만적이라서 건네기에 부끄러우면, '같이 눈이나 깜빡이자'와 같이 재치있게 제안하는 방법도 있으니 잘 알아두자. 혹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낭만적으로 이런 약속을 하고 싶으면 '같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자'라는 방법도 있으니 이 말도 같이 알아두자.



    이외에도 '같이 몸이나 씻자', '같이 생각을 하자', '같이 언성을 높이자' 등과 같은 방법이 있으나, 그 실용성과 참신성 면에서 위의 네 가지 방법에 미칠 바 안된다.

    그래도 '같이 밥이나 먹자'가 제일 무난하고 괜찮다는 것으로 결론이 날 것 같다. 혹시나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이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고 그와는 다른 색다른 약속을 잡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위의 네 가지 방법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적절히 사용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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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블러디 선데이」를 통해본 6.29 유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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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공수부대의 총격에 거리 시위를 하던 아일랜드 시민들이 하나둘씩 고꾸라진다. 아일랜드 시민들은 공포와 충격에 휩싸여서 여기저기로 도망가지만 영국군이 쏜 총알은 그들을 차례차례 명중시킨다. '설마 맨몸으로 나가는데 쏘겠어' 하는 생각도 잠시, 어느새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학살이 끝난 후의 거리는 피와 시체 뿐이었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비무장 시위를 벌이던 아일랜드 데리 시민 열 세명이 영국군 총에 맞아 사망한 역사를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북아일랜드 지역은 여전히 영국의 통치 하에 있었다. 여기에 아일랜드가 반발하며 신교도-구교도의 분쟁도 함께 발생하여 결국 '피의 일요일'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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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사건을 담담히 바라보는 시점이 인상적이다. 영화 내내 사건의 동요에 따라 흔들리는 16mm 핸드헬드 카메라는 사건의 사실성과 긴박함을 더해준다. 또한 사건에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데에 영화는 집중한다. 즉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고 영화는 사건의 흐름만 따라갈 뿐이다.

    거리 시위를 하던 중 '첫 총성'이 울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시선을 따라갈 뿐이기 때문에 누가, 어디서, 왜 처음 총을 격발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총성이 들릴 뿐이다. 그 결과는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잔혹했다. 첫 총성에 놀란 영국군은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고 비무장 시민들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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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여기서 영국군은 왜 동요하여 총을 쏘았을까? 첫 격발이 영국군의 것일 수도 있지만, 시위대의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시위를 준비하면서 무장투쟁파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음모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기회를 타 총을 나눠주려는 의도를 은근히 내비치고 유혈 충돌을 내심 바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IRA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무력집단이기 때문에 출동 대기하는 영국군들은 일말의 불안감에 휩싸였었다. "IRA가 총격전을 벌이는 걸까? 아니면 발포 명령이 떨어졌나?" 그 자리에 있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 사건이 종결된 후에 총을 든 시위대를 보지도 못했다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한 군인은 시위대가 먼저 총격을 시작했다고 당연한 듯 말한다.

    이 정도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이제 관객은 의문에 빠진다. "왜 영화는 누가 처음 총격을 시작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까?" 당황한 일개 군인의 실수일 수도 있고, 유혈 투쟁을 기대한 IRA의 음모일 수도 있다. 왜 영화는 그 판단의 단서조차 제공해주지 않고, 단지 '일발의 총성만 들려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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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나약한 개인과 그를 억압하는 사회 구조'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그 특수한 상황 속에서라면 누구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물론 그 선택에 있어서 개인의 편차는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RA의 음모였다 할지라도,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는 IRA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켜 가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싶었겠는가? '나약한 개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첫 총성'의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유혈 사태의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킨 구조적 모순'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 아일랜드 시민은 시위를 나와야만 했고, 왜 영국 군인들은 방아쇠를 당겨야 했는가. 시민과 군인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 유혈사태의 구조적, 근본적 원인은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몰수하고 반(反)구교도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아일랜드의 여론에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던 영국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약한 개인들을 앞세워 비극을 조장한 영국 정부에 이 유혈 사태의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 것이다.


    촛불 집회로 눈을 돌려보자. 6월 29일, 우리는 '피의 일요일'을 직접 목격했다. 수많은 시민이 전경의 무차별 진압에 희생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전,의경 측에서도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 유혈 충돌 이후에 벌어지는 논의의 대부분은 '누잘못했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촛불 집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위대가 먼저 폭력적으로 나오니 거기에 맞게 강경 진압을 한 게 아니냐'는 식이고, 그에 대하여 촛불 집회 측은 '전,의경이 먼저 강경진압을 하니까 방어적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누가 먼저 때렸나. 누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였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논리적 근거가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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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화 <블러디 선데이>로부터 이 유혈 충돌을 보는 관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 전, 의경을 욕하는 누구도 자신이 전, 의경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순간이야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시위대의 입장은 더 안타깝다. 맨몸으로 전, 의경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지는데, 어떻게 무조건 '비폭력'만 외치고 있나. 머리는 '비폭력'을 외쳐도 어느새 몸은 정당방위를 위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주위에서 자기 부모님, 자기 자식, 자기 친구 같은 사람들이 맞아서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진정하고 비폭력을 외치겠는가.

    전,의경도 시민도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나약한 개인을 꼭 이렇게 잔혹한 현장으로 내밀어야 하는가. 이 유혈 사태의 근본적 모순은 바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태도'에 있다. 국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한 지 불과 닷새째만에 이명박 정부는 강경 일변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루가 갈수록 가관이다. 시민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도, 전,의경의 심신에 고통을 가하며 가혹한 진압을 명령하는 것도 바로 '이명박 정부'이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시민들이 변질되었는지 말았는지를 논할 때가 아니라 이런 사태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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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협상도 하고 했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비율만큼 촛불의 수도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많은 수의 촛불은 아직도 추가 협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수도 많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먹을 거리'에 대한 시민의 권리 요구는 결코 '민주화'에 뒤지지 않는다. 독재 정권를 타도하는 것 만큼 개개인의 건강권,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을 수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 우리는 안전하지 못한 먹을 거리가 수입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가?

    꼭 '광우병 문제'가 아니더라도, 국민을 좌빨, 친북단체, 폭도 등등으로 몰아가며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하는 이명박 정부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안전한 음식 좀 먹자고 시청으로 나오는 사람들보다 이명박이 더 보호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결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평화 거리 시위를 하던 아일랜드 청년들은 유혈 사태 이후에 무장투쟁파인 IRA로 달려가 총자루를 굳게 쥔다. 약세였던 IRA는 이 사건 이후에 급성장세를 보인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피는 피를 부른다. '비폭력'의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 어느 쪽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데에 이명박 정부가 동참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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