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

  
 
    나 같은 경우, 영화를 보기 전에 조그만 정보도 들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알고 보는 경우 재미를 반감시키기 때문인데, 정보를 듣고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로 '전체적인 평(좋다/나쁘다)'과 '느낌'에 의존해서 영화를 고른다. 소문이 좋은 영화는 대개 보는 편이고, 소문이 없더라도 제목과 포스터에서 느낌이 오는 영화는 통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지니지 않은 채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보았다. 이 영화는 우선 제목의 느낌이 좋은 경우고, 결정적으로 믿고 보는 '브래드 피트 표' 영화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보았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 마니아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소위 '브래드 피트 빠' 였다. 난 그냥 잘 생긴 배우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면 단순히 얼굴만 잘난 놈이 아니었던 것. 이후에 그의 영화를 한 편 한 편 보다보니, 그렇게 얘기할 만 하구나 싶었다. 특히 "파이트 클럽"은 내가 꼽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보고나서 안 사실이지만,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 낸 '데이빗 핀처'가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 원래 난 할리우드 감독, 배우 이런 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이 감독이 '세븐'과 '조디악'을 연출한 감독이라니 좀 놀라웠다. 그런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영화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보를 차단시키는가 하면, 난 이 영화의 감독이 '팀 버튼'일 것 같다는 예감으로 끝까지 관람했다. ㅋㅋㅋ 주인공 이름도 '벤자민 버튼'인데다가, 영화 느낌도 비스무리해서. 영화를 보기 전에 '벤자민 버튼'이 혹시 영화 감독은 아닐까 생각했던 건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께만 알려드리는 비밀. 쉿!)

    영화는 정말 좋았다. 볼 때보다 보고 난 뒤가 더 좋고, 보고 난 직후보다 한참 뒤에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그저께 친구랑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꾸 자꾸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내게 준 '울림'의 증명이다. 그 '울림'은 표면적인 재미와 감동을 넘어서는, 인생에 관한 '성찰'이었다. 고작 스무해 남짓 살아온 젊은이에게 '죽음'과 '40년, 60년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

    (자, 지금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담겨있을 수 있다. 원체 리뷰에는 줄거리를 쓰지 않는 타입이라 영화를 보는 데 크게 지장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안 읽고 보시는 게 좋을 듯. 이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와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침해쌀 님의 리뷰'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하다.)


    이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에 태어난 벤자민 버튼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영화제목 처럼 그 남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의 친부는 쭈글쭈글한 노안과 온갖 잡병들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어떤 양로원 문앞에 버리고, 그 양로원의 주인이 '남들과는 다를 뿐인' 이 아기를 키우기로 작정하면서 그의 인생은 비로소 시작된다. 

    잔잔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나름 '반전'이 존재한다. '기이한' 벤자민 버튼도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관객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의 초반부는 '참을성'을 요구한다. 노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나서 소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에게 관객은 동정심을 느낀다. 한창 귀엽고 예쁜 나이에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이 얼른 '젊음'을 되찾고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기를 관객들은 내심 바라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린다. (그 이면에는 얼른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도 꽤 큰 듯. ㅋㅋ)


     자기 일을 가지게 되고 첫사랑에 빠지는 벤자민 버튼을 보며 관객들은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벤자민 버튼은 드디어 '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이제 벤자민 버튼이 빛을 보겠구나, 행복해지겠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관객들의 그런 예측 사이로 영화의 '느릿한 반전'이 스며든다. 아무리 젊어지고 피부가 탱탱해져도, 벤자민 버튼 역시 '시간'과 '죽음'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해진다. 남들의 기준에서는 '더 젊어지는' 인생이겠지만, 벤자민 버튼에게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더 늙어지는' 과정이다.

    벤자민 버튼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노년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벤자민 버튼이 더 불행하게 죽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의 죽음이란 대개 그러하다.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자의식을 버려가는 과정은 보통 인간들의 죽음과 닮았다.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의 예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느릿한 반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또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내러티브 속에 자신들의 의도를 행위하는 '긍정적 인도자' 를 등장시키곤 한다. 이들은 주인공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람의 행위는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긍정적 인도자'의 역할을 맡았을까?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고민이 클 것 같다. 엄마인 퀴니? 부인인 데이지? 아니면 간지나는 선장? 인생 역전의 러시아 부인? 혹시 벤자민 버튼? 내 생각에 그 모두가 정답이다.  이 영화는 '긍정적 인도자'들로 가득차 있다. 감독의 의도가 '인생'을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가 '긍정적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며,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이다. 


    '괴물'처럼 생긴 벤자민 버튼을 사랑으로 키우는 퀴니도, 노인처럼 생긴 꼬마 벤자민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데이지도, 벤자민 버튼에게 노동과 모험심과 용기를 가르쳐준 예술가 선장(♡ <ㅡ 개인적 애정의 표시ㅋㅋ)도, 젊을 때 도전했다가 포기해버린 영국해협 도해를 최고령 신기록으로 이루어낸 러시아 부인도 모두 주인공이다. 벤자민 버튼이 기이한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아마 저 가운데 어떤 인물이 주인공이었더라도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함'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그의 태생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똑같이 지낸 삶'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벤자민 버튼이 죽음을 맞이하듯, 이 영화에서 그와 관계맺는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감독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을 '죽이려고' 애쓴다. 아빠 버튼은 늙어서 죽고 선장은 일본군이랑 싸우다 죽고 퀴니는 죽는 지도 몰랐는데 죽고 데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죽는다. (뭐, 번개에 7번맞고 안 죽은 노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ㅋㅋ) 즉,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삶'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씩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누군가는 강가에 앉기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번개에 맞고, 누군가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예술가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단추를 만들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누군가는 그냥 엄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의아한 점은 벤자민 버튼이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벤자민 버튼은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보지 않았는가? 2시간 40분동안 정줄놓고 보던 것이 바로 벤자민 버튼의 일생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살았다.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는 거꾸로 살았다' 정도가 아닐까.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은 것'은 퀴니가 말하듯이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넌 남들과 다를 뿐이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 뿐이지."

    그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탄생하여 젊음의 기쁨을 누리고 노년에 인생을 정리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일생의 여로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사랑하고 헤어졌다. 그의 시계는 단지 거꾸로 돌고 있었을 뿐, 흐르는 시간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인 동시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이다.


    영화평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 시간의 무거움, 인생의 소중함을 억지스럽지 않게,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아마 또 보러 갈 것 같다. 또 보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틈틈이 챙겨보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고전(古典)'의 한자 모양을 풀이하면 '오랫동안 책상 위에 올려두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을 가진다. '영화로서 얼마나 잘 만들어졌나' 를 넘어서서 '내게 얼마만큼의 영감을 주는가'라는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적어도 나에게는 '고전', '클래식'이 될 영화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난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덧1) 나이를 먹으신 어르신 분께서 쓰신 리뷰를 보고싶다. 분명히 젊은 놈이 본 바랑은 다르게 영화를 봤을 것 같은데. 볼 수 있을까나?


덧2) 이 영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부분!) 특히 나는 '바다'와 '바닷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선장과 만난 이후부터 펼쳐지는 장면들에 큰 인상을 받았고, 또 벤자민 버튼이 가족을 떠나 세계 여행을 다니는 장면도 너무 아름다웠다. 안 그래도 요즘 여행 떠나고 싶은데, 불을 질러라 질러. ㅠ_ㅜ

덧3) 더 좋은 명대사들이 있는데, 그런 건 감추고 감추었다. 영화를 보면서 직접 보시라! 영상과 언어의 절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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