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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5.06 졌다. 8
  3. 2009.04.27 공유 4
  4. 2009.02.1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 28
  5. 2009.02.16 불안,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22

Jack Wilshere, 가장 거대한 재능

 



1. 프로필[각주:1]

- 이름 : Jack Wilshere, 잭 셔 (셔가 아님에 주의!)
- 국적 : 잉글랜드
- 생일 : 1992년 1월 1일
- 포지션 : 좌우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
- 백넘버 : 19
- 입단 날짜 : 2001년 10월 1일 (입단 날짜로는 1군 중에서 가장 선배뻘)
- 1군 데뷔 : 프리미어 리그 vs 블랙번 로버스 전 (A), 2008년 9월 13일, 4-0 승리.
- 1군 데뷔골 : 칼링컵 쉐필드 유나이티드 전 (H) 2008년 9월 23일, 6-0 승리.


2. 키작은 꼬마의 퍼스트 터치


   아스날 감독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벵거는 리그 라이벌인 맨유, 리버풀에 비해서 빈약한 재정으로 팀을 운영해왔다. 하지만 그는 뛰어난 스카우팅 시스템과 선수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용병술을 발판으로 작가주의적 "발굴과 갱생" 시리즈를 선보였고, EPL과 전유럽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러한 시리즈는 많은 팀들에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주었고 아스날 고유의 아름다운 축구를 가능케했다. 하지만 거지는 흥해도 3년 안에 망한다고... 맨유, 리버풀과는 격이 다른 '졸부' 첼시의 등장, 무리한 에메레이츠 스타디움 건설, 라이벌 팀들의 빠른 벤치마킹, 무패 멤버들의 이탈이 연이어 이루어지면서 아스날은 5년째 무관을 경험하는 중이다. 현재 네이버 어중이 떠중이들에게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리그 5위라니!! 5위라니!!) 지난 시즌 빌라, 에버튼에 이어 이번 시즌에는 심지어 '리얼 부'를 보여주겠다던 맨시티까지 빅4 자리를 넘보기에 이르렀다. (우리가 원래는 안 이랬는데... ㅠㅠ)


  여튼 물려받은 재산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도 부귀 누리고 싶으면 자식 농사를 잘 해야 된다고, 벵거는 유스 정책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사비, 이니에스타, 메시, 보얀 등을 길러낸, 유럽 최고의 유스 시스템을 자랑하는 바르샤를 벤치마킹하여, 내조 담당 Steve Bould 유스 코치와 함께 자식들의 조기 교육에 들어가기 시작하니...

  잭 윌셔는 U-16, U-18, 리저브, 1군까지 차근차근 테크를 타고 있는, 바로 그 아스날 유스의 첫 결과물이다.





3. 스페인에 대한 세스크의 대답.. 이 아니구나... 스페인의 세스크에 대한 잉글랜드의 대답.


  14살의 나이에 U-16 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윌셔는 벵거가 므흣한 웃음을 연발할 정도로 몹시 빠른 성장세를 보였고, U-18 팀과 리저브 팀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08/09 프리 시즌에 드디어 아스날 팬들에게 용안을 드러내셨다.
 
  여러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하고 매치 핏을 만드는 데 주력하는 프리시즌 성격 상 윌셔는 1군 경기에 출전할 기회를 조금 부여 받았는데, 그 때마다 훌륭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08/09 시즌의 우울한 전망에도 불구하고 아스날 팬들이 정신 못 차리고 하악하악 거리게 만든, 아주 인상적인 데뷔였다. 특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살가도를 단 한 번의 터치로 제치는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꼬꼬마의 포스는 여타 유망주들의 그것을 훨씬 상회하여,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와 전세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다.

  아스날의 꼬꼬마들이 다 그렇듯 리그 경기보다 칼링컵과 FA컵에서 출장 기회를 잡았던 윌셔는 램지, 벨라 등의 다른 꼬꼬마들과 함께 쉐필드를 6대0, 위건을 3대0으로 격파하는 등 성장세를 꾸준히 이어갔다. 물론 1군 출전 기회도 있었다. 2008년 9월 13일, 16세 256일의 나이로 1군 경기에 처녀 출장하여 세스크가 갖고 있던 아스날 최연소 리그 데뷔 기록(17세 103일)과 1953년에 게리 워드가 세운 프리미어리그 최연소 리그 데뷔 기록(16세 321일)을 경신했다.


                              "우리 팀에 놀러왔던 베컴 횽과 함께!"


 지금부터는 사과를 좀 해야겠다. 부와 명예와 미인을 모두 거머쥘 축구 스타기 되기 위해 땀방울 블링블링 열심히 연습하고, 청운의 꿈을 가지고 유소년 리그에 출전했을 다른 EPL 팀 유스 선수들에게... 아니, 이미 1군에 데뷔하고 위건 같은 팀도 바르는 애를 어떻게 또 유스 리그에 출장시키냐고.. ㅠㅠ 18살도 안돼서 인생의 쓴맛신맛씨레기맛을 다 경험했을 다른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그 이후, 칼링컵도 떨어지고 시즌 막판 순위 경쟁에 정신없는 아스날에 윌셔의 출장 기회가 있을리 만무했고, 실망한 윌셔는 유스 리그와 FA 유스컵을 우ㅋ걱ㅋ우ㅋㅋ걱ㅋㅋㅋ 잡아드셨다. 아스날 U-18 팀은 EPL에서 내로라하는 유스 팀을 보유한 맨시티, 리버풀, 토트넘, 빌라 등을 FA 유스컵에서 모두 쳐바르며 명실상부한 유스 최강이 되었다. (사실 이때 윌셔 말고도 많은 유스 선수들이 잘해줬기에 우승을 할 수 있었고, 벵거의 자식 농사가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벵거가 처음 유스를 육성하기 시작할 때 14~16살이었던 선수들이 현재 이 팀의 주력을 형성하고 있으며, 리저브팀에서 머물며 1군 테스트를 고대하고 있다.)

  08/09 시즌에 새 역사도 쓰고 유스 전교 1등도 쳐묵쳐묵한 윌셔는 09/10 프리 시즌이 되어 다시 핫 이슈가 되었다. "생각없이 늘 내가 내가 하는 패스~♪ 내 맘대로 또 자꾸 자꾸 하는 슛~ 아무렇게나 살짝 살짝 드리블~♬" .... 미쳤다. (그래 나 윌셔 빠다.) 센세이셔널했던 1년 전보다 더욱 성장한 모습을 보이며, 에메레이츠 컵에서 AT 마드리드, 레인져스를 맞아 또 2경기 다 MOM 쳐묵쳐묵. MVP에 해당하는 "토너먼트의 선수"는 아르샤빈이 받아서 살짝 의아했지만(횽도 최고ㅠb), 윌셔는 그 2경기의 활약상으로 카펠로의 눈에도 들어와(아니, 이미 카펠로는 윌셔를 보러 경기장에 와 있었다...), 잉글랜드 국대 콜업까지 거론되고 있다.

  요 정도가 지금까지 윌셔의 활약상, 커리어, 성적표 쯤 된다.


4. 그리고 루니. (응?)


                    위 사진은 글쓴이의 악의가 전혀 담기지 않았으며, 
     잉글랜드 언론 "The Sun"에 게재된 사진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히는 바임.[각주:2]


  아스날 빠돌이, 윌셔 빠돌이가 분명해 보이는 글쓴이가 갑자기 루니를 언급해 의아하시겠지만, 사실이다. (뭐가?) 루니는 밀레니엄 이후 잉글랜드 최고의 재능이며, 쩐이 딸려 영입하지 못했을 뿐 벵거도 매우 눈독 들였던 바 있다. 그랬던 벵거가 윌셔에게서 루니의 향기를 맡았다고 한다.[각주:3] 윌셔가 정말 제 2의 루니, 혹은 그를 능가하는 월드 클래스가 될 수 있을까?

  윌셔의 성공은 단지 윌셔빠의 쾌락만을 담보하지 않는다. 프렌치 커넥션 때문에 자국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잉글 언론의 천대를 받던 아스날이 로컬 유스들을 속속 키워내면서 잉글랜드화되고 있고, 그 첫 작품이 바로 윌셔다. 로컬 유스들의 성공은 언론의 호감 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팀 멘탈도 창출해낸다. 로컬들은 웬만해선 팀을 떠나지 않는다. 아데바요르처럼 변덕이 심한 아프리칸, 세스크처럼 언젠가는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타국 선수가 주축을 이루는 아스날보다 맨유가 더 안정적인 스쿼드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게다가 윌셔의 성공에 드는 비용은 맨유가 루니에 지불했던 수천만 파운드에 비하면 공짜나 다름없다. 리얼부 운운, 이브라 어쩌고 하는 Money 리그의 치열한 틈바구니에서 유스 선수로 수천만 파운드의 가치를 창출해낸다면, 재정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놓인 아스날에겐 아주 큰 자산이 될 것이다. (뭐, 아스날이 윌셔를 만들어낸 게 아니라 윌셔가 아스날에 온 거라는 말도 많다. 벵거가 잘 키웠다기 보다는 그냥 운이 좋았다, 복 받았다는 말. 하지만 레알과 바르샤의 예를 보면 세공사에 따라 원석은 돌도 되고 보석도 된다.)

  윌셔의 미래가 100% 장밋빛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윌셔의 성공은 아스날에게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다른 팀과 차별화된 생존 방식을 택한 아스날의 원대한 항로에서 살아남느냐, 뒤집히느냐를 결정할 조타수의 임무가 17살짜리 천재 꼬꼬마에게 주어졌다.


                                            쓰읍....



* 별첨) 잭 윌셔 SWOT 분석

- Strength
 : 천재적인 드리블링. 윌셔는 공을 가지고 달리는 재능을 타고 났다. 메시나 로벤처럼 폭발적인 순간 스피드를 보유한 것은 아니지만 지단이나 델피에로에게서 보이는 천재적인 타이밍 감각을 가지고 상대방 수비수가 근접하기조차 어려운 드리블을 구사한다. 수비수가 몸으로 비비면 밀릴 수 밖에 없는 윌셔가 살아남은 비결.

 : 패스와 슛도 수준급. 벵거는 아스날 유스 선수들에 대해 인터뷰하며 '이미 테크닉은 완성된 선수들이 더러 있다'고 했었는데, 윌셔는 그 중에서도 최고이다. 1군 선수들과 비교해도 이미 최고급의 기술 수준을 보유하고 있다.

 : 냉철하고 창의적인 축구 지능과 안정적 멘탈. 일찍부터 피지컬 뿐만 아니라 축구 지능과 멘탈을 완성했기 때문에 루니는 잉글랜드 최고의 재능이 될 수 있었다. 게임과 전술에 대한 높은 이해도, 패싱 루트를 순식간에 찾아내는 순발력과 창의성,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냉철함과 자신감, 잇따른 성공과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도 들뜨지 않는 평정심. 윌셔는 17세의 나이에 이 모든 걸 갖추었다.

 : 귀여운 페이스. ㅇㅇ

                         에메레이츠컵 레인져스전이 끝나고 좋아 죽는 윌셔

- Weakness
 : 약한 피지컬. 170cm 의 키에 비해 몸싸움이 많이 약한 편은 아니다. 무게 중심이 낮게 잡혀있고 밸런스도 좋은 편이라서 밀면 넘어질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EPL은 거친 몸싸움으로 유명한 리그. 아무리 기술이 좋더라도 몸싸움에서 상대방을 이겨내지 못하면 볼키핑 자체가 힘들어진다. 자신이 롤 모델이라고 여기는 메시의 생존법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체력은 괜찮은 편이다. 이틀 연속 벌어진 에메레이츠컵 경기에서 첫 게임은 후반전, 두 번째 게임은 풀타임으로 뛰면서도 끝까지 줄기차게 뛰어다녔다.)
 : 몇 분 간 생각해봤는데, 이거 말고는 약점이 없다...

- Opportunity
 : 아스날은 젊은 피에 관대한 클럽이다. 게다가 윌셔는 벵거의 플랜 한 가운데에 위치할 가능성이 크고, 이번 시즌을 기점으로 점점 1군 경기 출장수를 늘려갈 것이다. 벵거가 젊은 선수를 육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라는 점 역시 윌셔의 장래에 긍정적인 부분이다.

 : 잉글랜드는 테크니션에 목말라있다. 킥&러쉬로 대표되던 과거 잉글랜드 축구의 유산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윙어의 자리에서 기술적으로 상대편 수비를 압도할 수 있는 선수가 없다. 조콜이 어린 시절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나 그 성장세는 실망적이다. 빌라의 애쉴리 영이 그 대안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윌셔도 몇 년 뒤에는 노려봄직하다. 팀 선배인 월콧도 벌써 라이트 윙어의 주전 자리를 넘보고 있으니 말이다.
  선수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카펠로가 급히 국대에 올릴 것 같지는 않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잉글 국대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경우에는 세대 교체의 일환으로 윌셔가 뽑힐 가능성이 있다. 윌셔는 현재 잉글 국대 3군에 해당하는 'Outsiders' 리스트에 오웬, 아그봉라허, 깁스 등과 같이 올라가 있으며[각주:4], 얼마 전에 U-20 대표팀에 발탁되어 U-20 월드컵에 참가할 예정이다.
  (성장을 과도하게 부추기는 것도 좋지 않지만 월드컵이라는 대회가 선수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믿기에 2010 월드컵에 이르게 참가하게 되더라도, 긍정적이라 예상한다.)


                           잉글랜드 U-18 대표팀에서 10번을 달았던 윌셔

- Threat
 : 잉글랜드 언론의 과도한 관심은 선수에게 '항상' 좋지 않다. (아, 벤트너라면 그 반대일지도..) 조콜 역시 뛰어난 기술로 어릴 때부터 주목을 받았지만,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견디지 못하고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주위의 기대 만큼 성장하지는 못했다. 루니의 경우에는 평정심을 가지고 잘 헤쳐 나갔는데, 벵거가 윌셔도 비슷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듯이 윌셔도 잘 대처하리라 믿는다.

 : EPL이 피지컬적으로 거친 리그라는 점은 윌셔같은 테크니션에게 악재다. 잉글랜드 선수 중에 테크니션이 별로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메시가 활약하는 라 리가보다 더 빠른 공수 전환 속도와 더 강한 압박에서 윌셔는 살아남아야 한다. 압박 수비에 허둥지둥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피지컬적인 강인함이 동반되지 않으면 EPL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 윌셔는 현재 속한 팀 사정에 따라 좌우 윙어와 공격형 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 등의 포지션을 오가며 출전한다. 벵거는 윌셔를 장기적으로 베르캄프와 같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키우고자 한다는 의견을 밝힌 적 있다. 현재는 다양한 포지션에서 일종의 '경험치'를 쌓고 있는데, 이 기간이 길어지면 윌셔의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재다능하게 여러 포지션의 역할을 수행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 포지션에서 그 포지션의 고유한 움직임과 느낌을 체화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넥스트 오웬이 되고 싶었지만 현재는 몇 년 째 윙어로 빠져 있는 월콧의 경우, 언제 톱의 자리로 올라갈지 알 수 없다. 몇 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스트라이커의 역할을 잘 수행할지도 미지수다. 마찬가지로 윌셔도 1~2년 안에는 한 포지션에 정착시켜야 한다고 본다. 현재 팀의 사정이나 윌셔의 특성으로 봤을 때 윙어로 출전시켜서 리그에 적응시킬 가능성이 높은데,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키우고 싶다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출전시키는 것도 어떨까 싶다.



* 별첨2) Jack Wilshere Compilation


- 09.08.02 에메레이츠컵, Jack Wilshere vs 레인저스





- 09.08.01 에메레이츠컵, Jack Wilshere vs AT 마드리드




- 0809 시즌 vs 스토크 시티 리저브 팀, 어메이징 아웃사이드 슛




- 0809 시즌 Jack Wilshere 스페셜





  1. 국적과 포지션은 본인이 썼고, 그 외의 항목은 아스날 공식 홈 페이지에서 퍼왔음. [본문으로]
  2. http://www.thesun.co.uk/sol/homepage/sport/top10s/2455606/Top-10-football-lookalikes.html?offset=0 [본문으로]
  3. http://www.arsenal.com/news/news-archive/wenger-wilshere-is-reminiscent-of-rooney [본문으로]
  4. http://www.telegraph.co.uk/sport/football/international/england/5990489/Fabio-Capello-keeps-England-spotlight-on-young-Arsenal-player-Jack-Wilshere.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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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




졌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ps. 버금님... 버금님이 말씀하신 '그림 잘 그리는 법' 대로 머리 속으로 먼저 상상하고 그대로 그렸습니다? 잘 그린 거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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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있다보면, 같이 오래 있다보면, 전해지는 '느낌'이란 게 있다.

  나 지금 몹시 슬픔, 기분이 좋아 날뛰겠음, 선물을 받아 황홀함(응?) ㅡ 뭐 이런 선명한 감정이 아니더라도, 혹은 '나 지금 그렇다'며 징징대지 않더라도, 그런 게 있다.

  그 사람과 있을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느낌. 시간 뒤에 변색된 벚꽃잎 같은, 낡은 일기장 같은, 빨강-노랑-파랑으로 표현되지 않는 노을빛 같은.

  시간처럼 쌓여 온 기억의 모래성은 또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면서 손 틈으로 빠져 나가겠지만, 아려오는 바로 그 때의 느낌은, 잊을 수 있을지...

  뭐 어쨌건, '좋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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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

  
 
    나 같은 경우, 영화를 보기 전에 조그만 정보도 들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알고 보는 경우 재미를 반감시키기 때문인데, 정보를 듣고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로 '전체적인 평(좋다/나쁘다)'과 '느낌'에 의존해서 영화를 고른다. 소문이 좋은 영화는 대개 보는 편이고, 소문이 없더라도 제목과 포스터에서 느낌이 오는 영화는 통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지니지 않은 채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보았다. 이 영화는 우선 제목의 느낌이 좋은 경우고, 결정적으로 믿고 보는 '브래드 피트 표' 영화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보았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 마니아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소위 '브래드 피트 빠' 였다. 난 그냥 잘 생긴 배우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면 단순히 얼굴만 잘난 놈이 아니었던 것. 이후에 그의 영화를 한 편 한 편 보다보니, 그렇게 얘기할 만 하구나 싶었다. 특히 "파이트 클럽"은 내가 꼽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보고나서 안 사실이지만,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 낸 '데이빗 핀처'가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 원래 난 할리우드 감독, 배우 이런 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이 감독이 '세븐'과 '조디악'을 연출한 감독이라니 좀 놀라웠다. 그런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영화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보를 차단시키는가 하면, 난 이 영화의 감독이 '팀 버튼'일 것 같다는 예감으로 끝까지 관람했다. ㅋㅋㅋ 주인공 이름도 '벤자민 버튼'인데다가, 영화 느낌도 비스무리해서. 영화를 보기 전에 '벤자민 버튼'이 혹시 영화 감독은 아닐까 생각했던 건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께만 알려드리는 비밀. 쉿!)

    영화는 정말 좋았다. 볼 때보다 보고 난 뒤가 더 좋고, 보고 난 직후보다 한참 뒤에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그저께 친구랑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꾸 자꾸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내게 준 '울림'의 증명이다. 그 '울림'은 표면적인 재미와 감동을 넘어서는, 인생에 관한 '성찰'이었다. 고작 스무해 남짓 살아온 젊은이에게 '죽음'과 '40년, 60년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

    (자, 지금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담겨있을 수 있다. 원체 리뷰에는 줄거리를 쓰지 않는 타입이라 영화를 보는 데 크게 지장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안 읽고 보시는 게 좋을 듯. 이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와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침해쌀 님의 리뷰'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하다.)


    이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에 태어난 벤자민 버튼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영화제목 처럼 그 남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의 친부는 쭈글쭈글한 노안과 온갖 잡병들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어떤 양로원 문앞에 버리고, 그 양로원의 주인이 '남들과는 다를 뿐인' 이 아기를 키우기로 작정하면서 그의 인생은 비로소 시작된다. 

    잔잔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나름 '반전'이 존재한다. '기이한' 벤자민 버튼도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관객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의 초반부는 '참을성'을 요구한다. 노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나서 소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에게 관객은 동정심을 느낀다. 한창 귀엽고 예쁜 나이에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이 얼른 '젊음'을 되찾고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기를 관객들은 내심 바라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린다. (그 이면에는 얼른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도 꽤 큰 듯. ㅋㅋ)


     자기 일을 가지게 되고 첫사랑에 빠지는 벤자민 버튼을 보며 관객들은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벤자민 버튼은 드디어 '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이제 벤자민 버튼이 빛을 보겠구나, 행복해지겠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관객들의 그런 예측 사이로 영화의 '느릿한 반전'이 스며든다. 아무리 젊어지고 피부가 탱탱해져도, 벤자민 버튼 역시 '시간'과 '죽음'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해진다. 남들의 기준에서는 '더 젊어지는' 인생이겠지만, 벤자민 버튼에게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더 늙어지는' 과정이다.

    벤자민 버튼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노년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벤자민 버튼이 더 불행하게 죽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의 죽음이란 대개 그러하다.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자의식을 버려가는 과정은 보통 인간들의 죽음과 닮았다.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의 예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느릿한 반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또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내러티브 속에 자신들의 의도를 행위하는 '긍정적 인도자' 를 등장시키곤 한다. 이들은 주인공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람의 행위는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긍정적 인도자'의 역할을 맡았을까?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고민이 클 것 같다. 엄마인 퀴니? 부인인 데이지? 아니면 간지나는 선장? 인생 역전의 러시아 부인? 혹시 벤자민 버튼? 내 생각에 그 모두가 정답이다.  이 영화는 '긍정적 인도자'들로 가득차 있다. 감독의 의도가 '인생'을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가 '긍정적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며,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이다. 


    '괴물'처럼 생긴 벤자민 버튼을 사랑으로 키우는 퀴니도, 노인처럼 생긴 꼬마 벤자민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데이지도, 벤자민 버튼에게 노동과 모험심과 용기를 가르쳐준 예술가 선장(♡ <ㅡ 개인적 애정의 표시ㅋㅋ)도, 젊을 때 도전했다가 포기해버린 영국해협 도해를 최고령 신기록으로 이루어낸 러시아 부인도 모두 주인공이다. 벤자민 버튼이 기이한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아마 저 가운데 어떤 인물이 주인공이었더라도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함'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그의 태생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똑같이 지낸 삶'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벤자민 버튼이 죽음을 맞이하듯, 이 영화에서 그와 관계맺는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감독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을 '죽이려고' 애쓴다. 아빠 버튼은 늙어서 죽고 선장은 일본군이랑 싸우다 죽고 퀴니는 죽는 지도 몰랐는데 죽고 데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죽는다. (뭐, 번개에 7번맞고 안 죽은 노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ㅋㅋ) 즉,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삶'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씩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누군가는 강가에 앉기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번개에 맞고, 누군가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예술가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단추를 만들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누군가는 그냥 엄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의아한 점은 벤자민 버튼이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벤자민 버튼은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보지 않았는가? 2시간 40분동안 정줄놓고 보던 것이 바로 벤자민 버튼의 일생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살았다.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는 거꾸로 살았다' 정도가 아닐까.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은 것'은 퀴니가 말하듯이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넌 남들과 다를 뿐이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 뿐이지."

    그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탄생하여 젊음의 기쁨을 누리고 노년에 인생을 정리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일생의 여로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사랑하고 헤어졌다. 그의 시계는 단지 거꾸로 돌고 있었을 뿐, 흐르는 시간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인 동시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이다.


    영화평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 시간의 무거움, 인생의 소중함을 억지스럽지 않게,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아마 또 보러 갈 것 같다. 또 보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틈틈이 챙겨보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고전(古典)'의 한자 모양을 풀이하면 '오랫동안 책상 위에 올려두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을 가진다. '영화로서 얼마나 잘 만들어졌나' 를 넘어서서 '내게 얼마만큼의 영감을 주는가'라는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적어도 나에게는 '고전', '클래식'이 될 영화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난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덧1) 나이를 먹으신 어르신 분께서 쓰신 리뷰를 보고싶다. 분명히 젊은 놈이 본 바랑은 다르게 영화를 봤을 것 같은데. 볼 수 있을까나?


덧2) 이 영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부분!) 특히 나는 '바다'와 '바닷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선장과 만난 이후부터 펼쳐지는 장면들에 큰 인상을 받았고, 또 벤자민 버튼이 가족을 떠나 세계 여행을 다니는 장면도 너무 아름다웠다. 안 그래도 요즘 여행 떠나고 싶은데, 불을 질러라 질러. ㅠ_ㅜ

덧3) 더 좋은 명대사들이 있는데, 그런 건 감추고 감추었다. 영화를 보면서 직접 보시라! 영상과 언어의 절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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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법.


   


    지지난주에 발행됐던 시사IN 73호에는 1월 20일에 열린 <시사IN> 신년 강좌 3탄 '정혜신에게 김어준의 위기의 심리를 묻다'의 요약된 내용이 실렸다. 정혜신과 김어준이라는 두 심리 상담가의 강의 및 대담이었다. 탐독하다보니 '아, 이게 심리 상담의 매력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를 주제로 한 정혜신 씨의 강의 내용을 보고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 이거야.


    아래는 직접 그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한 내용이니, 한 번 읽어보시라.

    요즘 경제 전망이 어둡다는 뉴스가 자주 들리니까 마치 지금 시기에는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모두 똑같은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불안은 개인마다 다르다. 똑같은 상황에서 어떤 불안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마다 차이가 난다.

    사람은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강력한 욕구가 있다. 그래서 사람이 진짜 자기 존재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바가 뭔지 분명히 아는 것, 그것이 '자아 회복'이다.

(자아 회복의 걸림돌로 돈과 지식이나 학벌을 들고, 소득이 3.3배 오른다고 해서 아내가 남편을 3.3배 존경하지는 않을거란 얘기를 하면서)
 
    결국 은연중에 굉장히 어리석은 도식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게 되는데 이것을 정신분석학에서는 '마술적 사고'(magical thinking)라 한다. 원시인이 홍수와 같은 자연 재앙을 이기기 위해 마을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서 '내년엔 이런 재앙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믿는 것이 그 예다. 예측 불가능한 공포와 불안을 처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사고 체계가 바로 '마술적 사고'다.

    좀 전에 말한 돈이나 학벌 같은 것 역시 불안감을 달래기 위해서 만든 마술적 사고 같은 것이다. 이것은 자기 존재에게 다가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학원을 다니는 게 어쩌면 내 불안을 회피할 목적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우선 '다 멈추자'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다. 있는 그대로 내 불안을 한번 바라보자. 정말 뭐가 얼마나 불안한지, 일단 직면해야 한다. 그 과정 없이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중략, 그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자들 중 일주일에 한병씩 지급되는 생수의 반을 세수에 이용한 사람들, 즉 자기 존재를 의식하고 배려하는 사람들의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는 이야기를 함.)

    나는 자기 존재를 인식하고 느끼면서 사는 게 그 어떤 행위보다 더 실용적이고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길 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불안할 때마다 어떤 마술적 사고를 통해 문제를 회피하려 한 적이 혹시 없었나, 그것 때문에 스스로 불안을 털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경험에 다가가지 못해서 계속 불안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한 번쯤 가져보는 시간이었다면 좋겠다. 


1. 

    난 요즘 우리 사회에 '전염병'이 유행 중이라고 생각해왔다. 한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서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주체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기준과 판단에 영향을 받는 그런 상태를 난 전염병이라고 여기곤 했다. 이를테면 어떤 친구가 취직을 위해서 하고 싶은 걸 때려치우고 토익 공부와 컴퓨터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는데, 이 친구가 그런 공부들을 하기 시작한 건 자기 스스로 회의하고 고민하고 자기 자신을 설득시켜 스스로 선택한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위의 친구들 혹은 서로 접근은 할 수 있지만 면식은 없는 '간접적 관계자'(대표적으로 인터넷 상의 정보 교환자나 불특정 다수)들이 뭔가를 준비하는 것 같을 때, '나도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다크 포스가 스멀스멀 자기에게 밀려 들어온다. 이 과정은 일종의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과정이고, 결국 전염이 완료되면 자기 행위에 대해 주체적 판단을 배제시킨 '사고 정지' 상태에서 '타인을 모방'하는 데 급급해진다. 더구나, 자신의 행위가 '타인을 모방'하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스스로 판단했다고 믿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결국 그 행동은 타인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인데, 더 웃긴 사실은 그 '실체', '배후'가 없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병적 모방 행위가 진정 존재한다면 그 모방 대상 역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다면 모방의 대상, 또 그 모방의 대상, 또 그 모방의 대상인 근본적인 '일자(一者)'는 누구인가? 누가 처음 그런 행위를 시작해서 전염되고 또 전염되는 것일까?

    그 대답을 위의 강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불확실한 공포와 불안', 바로 그것이 전염병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개개인은 불확실한 공포와 불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몇 개의 '불안 해소가 가능해보이는 선택지' 중에서 사회의 다수가 선택하는 쪽으로 선택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타인에게는 마술인 것이 내게는 연금술이 된다. 이런 마술적 사고는 사회에 급속도로 전염된다.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배제한 채 '진정 나의 불안은 무엇이고, 이 불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라는 식의 판단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2. 

     이 기사를 읽고는 내 친구 중 한 명을 떠올렸다. 원래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 항체를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전염병에 걸린 친구였다. 그래서 이 기사를 소개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고나서 2주 정도가 지난 어제가 되어서야 이 기사를 보여줄 수 있었다. 그리고는 친구의 '마술적 사고'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러다보니 궁금해졌다. 나는 마술적 사고를 하지 않는가? 나는 불안이 없는가? 나의 불안은 뭘까? 등잔 밑이 어둡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 는 말처럼 난 다른 사람의 불안에 대해서만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었지, 내 스스로의 불안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 블로그의 글들을 조금 유심히 읽는 사람들은 이미 내 불안을 예측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진로'에 관한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두고 오랫동안 시간을 빼앗겼다. 생각해보면 이 고민은 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내 고민은 어떤 관찰과 경험에 의해 나 스스로 '난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판단이 자연스레 도출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그저 '이제 급한데, 공익 복무 기간이 끝나면 복학인데, 이제 제대로 진로를 잡아서 뭘 준비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달리고 있는데!' 따위의 불안감 속에서 이 불안감을 어떻게든 해소하려고 하는 과정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예전에 학부 졸업 전에 책 500권을 읽겠다는 목표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목표도 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가니까 나도 토익학원 가야지'하는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목표는 학자가 되려면 학교에 있을 때 책을 1000권 이상 읽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과 공부하기에는 좀 늦은 게 아닌가 싶은 내 불안감이 만들어낸 '불안 해소 장치'에 불과했다. 자신이 진정 책을 많이 읽고 싶다면, 저런 목표를 세우지 않아도 자연스레 좋은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을텐데. 단지 이런 사례만이 아니라, 어쩌면 내 인생은 '계속되는 불안 작용과 그 해소를 위한 마술적 반작용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

    그래서 앞으로는 (어디서든 당당하게 걷는 카라를 본받아) 이 불안감과 당당하게 대면하기로 했다. 내가 계속 진로를 고민하는 건, 아직 진로의 답을 내릴 수 없을만큼 내 경험과 관찰과 신념이 부족한 탓이었다. 문제를 풀 능력이 안되는데, 문제를 풀고자 하는 건 '과욕'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진로에 대해서 너무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고, 우선은 '나의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고자 하는 대로 살다보면 진짜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내가 앞으로 갈 길이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이 또한 마술적 사고가 아닌가 의심되긴 하지만, 난 이미 내 안의 불안과 한 판 붙었다. 이건 불안이 만들어내는 마술이 아니야!)

    시사인에 소개된 강의에서는 '자기 대면의 실천 방안'으로서 'Here and Now' 개념을 소개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실행하라는 조언이다. 정혜신 씨에 의하면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심리적 에너지 소모를 계속해선 안 된다. 내게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욕구가 무엇인지 금세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먼 훗날 내가 무엇이 될지 소모적으로 고민하기 보다는, 일단 현재의 내 삶과 내 욕구와 내 바람에 충실하려고 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나하나 해보면서 세상에 대한 관찰과 경험이 축적되면, 진정 내 앞길이 보이지 않을까 싶다.

    일단은 아시아와 남미를 여행해보고 싶은데, 공익 신분이니까 패스. 그렇지만 우리 나라 안에도 갈 곳은 많으니까. 일단 우리 나라의 산들을 하나 하나 만나보고 싶다. 이건 공익 신분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ok. 그리고 '난 꼭 대학원을 가야 해. 그래서 이런 책들을 읽어야 해' 이런 부담보다는, 자유롭게 다양한 책들을 읽고 글을 많이 쓰고 싶다. 미완성으로 끝난 밴드의 꿈도 다시 꾸고 싶다. 공익이 끝나면 여행을 갈텐데, 그 때를 위해서 돈도 좀 더 모아야 겠고.

    어제 내 과외생도 진로 고민을 많이 하던데. 아마도 이 땅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아직도 더 고민해야 할 문제이지만, 그래도 고민의 긍정적 성과를 거둔 지금은 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 서 있는 땅이 울퉁불퉁해보여도, 발 앞보다는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걸으라고. 그리고, 조그만 일에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자기 자신은 사랑하기에 너무 좋은 존재니까, 한 번 꼬옥 안아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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