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2, 박노해, 구미, 여행.


1




시합은 몇 번이고 뒤집어진다.
그리고 설령 졌다해도 시합은 하나만이 아니야.
이제부터 수많은 시합을 싸워나가지 않으면 안돼.

연애만이 아니야.
일, 병, 인간관계..
싸워야할 상대도 여러 가지야.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하고, 울기도하고, 웃기도하고,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는거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연전 연승으로 죽을때까지 웃기만 하는
그런 인생을 바라나...

- 아다치 미츠루, H2 12권 중에. 


2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

박 노 해



돌아보면

내 인생은 실패투성이


이제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

두번째 화살은 맞지 않겠다고

조용히 울며 다짐하다가


아니야

지금의 난

실패로 만들어진 나인데

실패한 꿈을 밀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에게 실패보다 더 무서운건

의미없는 성공이고

익숙한 것에 머무름이고 실패가 두려워 도사리는 것


실패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지지않는다.

성공했지만 의미 없는 것들이 있고

비록 실패했지만 더 의미있는 것도 있다.

누군가는 의미있는 실패라도 하며 쓰러져야만

그 쓰라림을 딛고 넘어 새날은 온다.


이제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말고

준비에 실패함으로

실패를 준비하지 말고

실패를 정직하게 성찰하며

늘 새로운 실패를 하자.



3


    난 얼마나 이기고 싶어했는지, 이기려는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패배와 실패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패배와 실패는 정확히 따져보면 다른 뜻이지만 삶에서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자기 자신과 싸워서 패배한 것이 바로 실패이기 때문에.) 박노해의 시를 보며 가슴 깊이 반성해본다.

    저 시를 본 뒤에 난 친구들을 만났고, (시에서 이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지만) 반 농담삼아 '뭐든지 져주겠다'며 나섰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보내보니, 져주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내 주장이 관철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 즐거웠는데, 내가 먼저 져주고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계속 얘기를 하면서 반성할 부분이 있었는데, 난 '모든 걸 져주겠다'는 마인드로 말하면서도 툭하면 이기려고 했던 것. 그러다가도 '아, 내가 이러면 안되지'라는 마음에 말을 접곤 했다.

    '의미없는 성공'과 '익숙한 것에 머무름이고 실패에 도사리는 것'. 내 삶을 되살펴보면 '의미없는 성공'에 만족하기 위해 얼마나 몸을 사렸는지 모른다. 나에게는 큰 실패없이 지금껏 인생을 살아온 게 만족스러운 점 혹은 일종의 자랑거리였지만, 그런 태도 자체가 나의 미래를 발목잡아 온 듯 하다. '이건 돈이 없어서 안돼. 혹시나 지원이 안되면 안되잖아?', '이건 재능이 없어서 안돼. 욕먹기 싫잖아.', '이건 실패 가능성이 너무 커. 안정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걸 해야지.'

    그래서 저 시를 읽고 조금씩 내 삶을 바꿔가고 있다. 까짓거 계획대로 안되고, 퇴짜 좀 맞고, 좀 떨어지면 어때. H2에서 나오듯이 연전연승도 안될 일이지만, 또 그렇다고 인생에 연전연패도 없거든. 인생은 초등학교 때처럼 100점을 맞지 못하면 뭔가 마음이 찝찝한 받아쓰기같은 게 아니니까. 10점을 맞아도 나 스스로 만족하면,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모 기업의 CF에서 나오는 훈이처럼, 엄마한테 5개 틀린 시험지를 내밀면서도 "나 잘했지?"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4


    친구를 보러 구미에 갔다. 정말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러 갔는데, 하루가 지나 그 다음날 집으로 가며 생각해보니 정말 '멋진 여행'이었다. 처음부터 '여행'이라 단정짓지 않았지만 '여행의 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느낌이랄까. 덕분에 생소한 곳에서 나를 낯설게 만들 수 있었다. 알기 어려웠던 '나'를 조금 더 알 수 있었다.

    죽어라 걷고 혹은 굉장한 속보로 걷고(ㅋㅋ), 구미 여기저기의 맛있는 음식들을 먹고, 뉴-뉴욕의 전망에 조금 놀랐다가 친구의 아픔에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늘을 뒤덮은 구름 사이로 새어나오는 햇살과 눈내리는 금오산에 경외감을 느끼며, 금오산 비 앞에서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사진을 찍을 수 없음에 조금 안타까워 했지만 폰카에 친구들 사진은 하나 남아있고, 구미 사람들의 이상한 사상을 체험하고, 박정희의 거룩한 흔적들을 엿보았고(ㅋㅋ), 오랜만에 기차 바깥의 풍경을 즐겼고, 약을 먹지 않아도 아프지 않았고, 엄마 보고싶고. (ㅋㅋ)

    귀차니즘과 게으른 내 성격 탓에 여행을 조금 밖에 다니지 못했는데, 이제는 여행을 좀 다녀야겠다. 사진을 잘 찍는 법도 좀 배워야 할 것 같고 평소에 걸어다니는 습관을 몸에 들여야겠다. 꼭 해외가 아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우리나라 곳곳이 너무 궁금해졌다. 올초의 약속처럼 사람을 더 사랑해야겠고 혼자서 가기로 계획했던 여행들은 취소하고 좀 더 사람냄새 나는 여행을 다니고프다. 

    내일은 몇 년 만에 가족 여행. 영덕으로 간다. 이히.


5

    이제 진짜 새해다. 아직 음력으로 안지났다고 새해가 아니라는 안일한 합리화를 할 수도 없다. 빼도 박도 못하게 새 해가 다가왔으니, 나도 새롭게 태어나야겠지. 새로운 실패를 해야겠지.

    이 블로그를 들러주신 분들도 다들 새해복 많이 받으시길 바랄께요. 부디 '희망'만은 잃지 마시어 지옥같은 이곳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한 해가 되시길. 

  
May the for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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