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에 해당되는 글 2

  1. 2008.06.26 생명, 그리고 모성.
  2. 2008.06.18 우석훈 - 고양이는 길들지 않는다. 2

생명, 그리고 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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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훈의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읽었다.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꼭 글로 써서 남겨야지,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 귀찮기도 하고) 그 느낌을 말로 풀어내기 전에 책을 읽으면서 느낀 그대로 가슴 속에 갈무리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버렸다.

    사람들은 자기들 이야기를 할 때는 '건강이 최고야!'라고 하지만, 사회 이야기를 할 때 똑같이 말하지 않는다. 사회도 사람이랑 똑같다. 사회도 아프면 즐겁지 않다. 행복해질 수 없다. 나날이 올라가는 빌딩과 개발되는 녹지를 보면서 지폐의 향긋한 냄새를 떠올릴 지도 모르지만, 이 도시는 언젠가는 아플 것이다. 자연이 아프면 사람이 아프고, 사람이 아프면 사회가 아프다.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아픈 사람이 바로 '아이들'이다.

    그래서 우석훈은 가장 행복한 시대에 가장 불행해야 하는 '아픈 아이들의 세대'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이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것은 빌딩 한 채도 아니고 /r/발음이 물컹하게 나는 꼬인 혀도 아니다. 그저 즐겁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며 그러기 위해선 건강을 지켜주어야 한다. 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점점 더 병들게 만드는가!

    이런 우리 사회의 몹쓸 모순을 제일 먼저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아토피 때문에 손을 꼬깃대며 제대로 긁적이지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이는 아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밤새 콜록대며 조막만한 얼굴을 내내 붉게 만들고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귀에서 계속 짓물이 나와도 나 아프다고 제대로 말도 못하는 아이들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어머니들은 생협에서 유기농 식품을 주문해 먹이고, 아이를 아프게 만드는 골프장에 출퇴근하는 잔혹한 부성을 탓하는 것이다.

    이 책은 3년 전에 쓰였지만 이 사회의 모성은 여전하다. 광우병 문제에 제일 강하게 반응한 사람들은 바로 이 어머니들이다. 내 자식 밥상에 미국산 쇠고기는 못올리겠다며 유모차끌고 시청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그 모성의 위대함에서 이 사회에 '생명'을 불어넣을 희망을 느끼고 같이 눈물 흘리는 우석훈이 있고, 내가 있다.

 
    이 땅에 생명의 숨결이 깃들기를 바라며 짧은 소회를 마친다.

우석훈 - 고양이는 길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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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새롭게 생긴 '미서방'에 대해서 조금 설명을 해야겠다. "우리 결혼했어요"에 나오는 김현중 같은 미서방은 아니다. (-ㅅ-) 한자 뜻 그대로 '아름다운 글이 보관되는 방' 정도이다.

  어감이 좋은 다른 단어들도 있겠지만 굳이 이 단어로 한 건 내 유년기 웹 생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모 인터넷 카페에서 잘 쓴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 이름이 '미서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거기에 올라갈 정도의 글을 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도 나이인 만큼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침에 조용히 책을 읽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글을 써버렸는데 다음날 미서방에 보관될 수 있었다. 지금은 유명 작가가 된 사람이 당시 미서방지기였는데 그 글에 극찬을 해주어서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모른다. 지금 보면 별 거 아닌 글이었는데도.

  여튼 그 때의 기억을 살살 곰씹으며 이 방을 만들어봤다. 이 블로그 세계에는 좋은 글이 너무나도 많고, 나만 보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우선 첫 번째 글은 우석훈 씨의 글이다. 분량이 꽤 길텐데 참을성을 가지고 읽어보았으면 한다. 수필 한 편, 또는 단편 소설 한 편 정도 읽는다 생각하면 될 것이다.


출처는 우석훈 씨의 블로그 "임시연습장 by retired"(클릭)이다.





[옛날 글] 고양이는 길들지 않는다.


옛날 파일을 볼 일이 있어서 뒤지다가 우연히 찾아낸 글이다.

이게 원래 <아픈 아이들의 세대>의 에필로그였는데, 원래는 그보다 1년쯤 전에 습작하면서 썼던 글이다.
 
아파트가 싫었던 이유들을 찾아보면서, 이런 종류의 글들을 꽤 많이 썼었다. 습작 시절에 써봤던 수많은 글들 중 하나...

요즘 사람들은 습작을 잘 안하는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습작을 3년 정도 하고나니, 글을 어떻게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할지, 약간 감이 잡혔던 것 같다.

책 도 습작이 필요하고, 짧은 글도, 여운을 가지려면 습작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평생 남을 단 한 권의 책, 아니면 짧더라도 강렬한 단 한 편의 글 - 예를 들면 에밀 졸라의 "J'accuse" 같은 - 을 위해서 평생 습작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단상에 대한 스케치 혹은 크로키 같은 느낌이 드는 글들을 내가 아주 선호하는 것은, 습작 시절에 노트를 놓고, 길거리 풍경을 스케치하듯이 그려내는 연습을 아주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A4 1장에서 2장 정도로 노트에 상황을 스케치해보는 연습은, 약간 도움이 되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 논문체 글쓰기에 익숙했던 시절, 어깨에 힘을 빼는데, 조금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 에필로그. 고양이는 길들지 않는다 >

우리 집은 여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고, 나의 부모님들은 30년이 넘도록 같은 집에 살고 있고, 넓지는 않지만, 마당이 있다. 이 마당이 완전히 와일드 번치다.

개도 키우고, 고양이도 키웠고, 내가 한참 개구장이이던 시절, 학교앞에서 병아리도 사와서, 닭이 되도록 키웠다. 잠깐이지만, 악어도 키운 적이 있다. 금붕어도 키웠고, 하여간 이것저것 많이 키웠다.

병아리와 강아지에 대한 슬픈 얘기가 있다. 학교 앞에서 사온 병아리들과 메리라는 강아지를 같이 키웠는데, 사이가 좋았다. 내가 봄에 사온 병아리는 요즘 같은 병든 병아리가 아니라서 그랬는지, 하여간 꼬고댁하고 울만큼, 그러니까 가을까지 컸다.

강아지는 자기가 엄마라도 된 것처럼 이 병아리 두 마리를 먹이고 재우고, 자기 밥을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그러니까 병아리들은 내가 키운 게 아니라 사실은 메리라는 강아지가 키운 셈이다.

문제는 병아리가 조금씩 바뀌면서 어른 닭이 되어간 데서 생겼다. 어느 날 자기 친구 병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아지가 이제는 닭이 된 병아리를 덥썩 물어버렸다.

너는 누구야?

강아지의 이 철학적 질문에 병아리는 자기가 이미 다 큰 닭이라는 대답을 할 길이 없었다. 한 마리는 강아지에게 물린 상처가 이내 도져 죽었고, 또 다른 한 마리는 다리에 빨간약을 바르고 한 달 정도를 그래도 친구처럼 지내다가, 또 다시 강아지가 던진 너는 누구야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피하다가 벽을 넘어 올랐다가 떨어져 죽었다. 우리 집은 언덕 위에 축대를 쌓아올린 집이기 때문에 앞 쪽 벽을 넘으면 바로 2층 낭떠러지다.

조그만 벽 정도는 날아오를 수 있던 이제 어른 닭이 된 병아리에게 ‘축대’라는 개념은 너무 어려운 개념이었나보다.

사실 이미 다 큰 닭의 처리를 놓고 우리 식구들은 갑론을박 중이었다. 병아리를 사온 나는 잘 지낼 수 있다고 얘기했고, 아버지는 그냥 삶아먹자고 했다. 만약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다면 방법을 찾았을 것이지만, 그때 나는 그냥 초등학교 4학년, 그야말로 10살짜리 애였을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닭을 잡는 것과 같은 복잡한 일은 해본 적이 없는 그저 초등학교 선생님일 뿐이다. 우리가 어쩔까 하고 시간을 보내는 한 달 동안 이미 어른 닭이 된 병아리들은 두 마리 모두 죽었다.

동물들도 철학을 한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강아지는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누구야? 닭은 이 질문에 답했어야 한다. 하다 못해 '삐악삐악'이라도 했었어야 했다. 어쩌면 했는지도 모른다. 소리가 꼬고댁하고 나와서 그렇지. 강아지의 질문에 닭은 대답을 했어야만 하는 존재적 상황이었다.

닭을 키우는데 실패한 나는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했지만, 정말 내가 고양이를 키울 수 있게 된 것은 몇 년이나 지나서였다. 부모님들이 고양이는 재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고양이는 똑똑하고 개는 멍청하다고 한다. 그렇지는 않다. 개는 때로 고민한다. 넌 누구야? 그러나 고양이에게 넌 누구야라는 질문은 없다. 내가 20년 동안 관찰한 바로는 고양이는 강아지처럼 복잡한 생각보다는 '먹는 거와 먹는 데가 나오는 거'로 세상을 인식한다.

개는 주인을 알아본다. 그러나 고양이는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 고양이가 인식하는 것은 이곳은 먹을 것을 주는 곳, 주인은 먹을 것을 가지고 오는 사람, 그 정도의 인식을 할 수 있다.

고양이를 키우면 대가족을 각오해야 한다. 개는 담벼락을 넘어가지 못하지만, 고양이는 담벼락의 장벽 같은 건 장벽 측에도 속하지 않는다. 고양이가 삼 미터 쯤 되는 담벼락을 뛰어서 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답다. 그 도약이 아름답다. 내가 아는 고양이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생각도 아름다운지는 모르겠지만....

에피소드 1. 나 이뻐?

내가 처음 키운 고양이는 좋은 종자였다. 얼룩털을 가지고 있는데, 얼핏 보면 호랑이를 닮았다. 무척이나 예뻐했고, 그 직전에 죽은 강아지를 슬퍼하며, 고양이로 전공을 바꿔보았다.

고양이를 키우는 건 쉽다. 음식도 안 가린다. 다만 비린내가 나게 해주는 것이 요령이다. 남은 밥에 참치 캔의 국물을 조금 부어주거나, 하여간 비린내가 조금만 나게 해주면 고양이는 아무 군소리 없이 신나는 만찬을 벌인다.

내가 키웠던 열 마리가 넘는 고양이 중에 처음의 이 놈은 그래도 애교가 있는 편이다.

고양이는 멸치 눈은 먹지 않는다. 닭뼈가 목에 걸려서 고생하는 강아지랑 달리, 고양이의 식사는 섬세하다. 제대로 된 멸치 같은걸 한 마리 주면 오물오물 먹는다. 나는 처음에 무척 귀엽게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눈을 골라내는 과정이다. 다 먹고는 멸치 눈을 퉤 하고 마당에 뱉는다... 성질머리 하고는... 고양이는 눈이 소화가 잘 안된다는 것을 아는가보다.

굶기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난 모질지 못해서 그런 실험은 해보지 못했다. 굶기면 눈을 먹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개의 고양이는 멸치 눈은 먹지 않는다.

마른 오징어를 고양이에게 주면 반응이 없다. 이건 딱딱한 나무 같은 거야... 생선인데? 아니야... 비린내가 나지 않쟎아?

오징어를 고양이에게 먹이려면 물을 조금 바르면 된다. 음... 생선 맞아... 금방 정신을 놓으면서 허겁지겁 먹는다.

이 고양이가 그래도 매일 밥을 주는 나에게 교태를 떠는 순간이 있다... 나 이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 출몰하는 쥐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고양이를 들이게 된 동기인걸 알았던 것 같다.

하여간 영민한 고양이라서 그런지 쥐는 잘 잡는다. 우리 집의 쥐는 금방 없어졌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속해서 쥐를 잡아온다. 나중에는 꽤 먼 곳까지 원정을 간다는 걸, 동네 사람들이 부모님들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문제는 나 이뻐하기 위해서 쥐를 잡았다는 걸 자꾸 보여주려는데서 생겨났다.

몸통은 먹고, 쥐 머리를 마당에 늘어놓는다. 어떨 때는 두 개, 어떨 때는 세 개...

고양이가 우리 식구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보기 전에 잽싸게 나가서 마당의 쥐 머리를 치우는 것도 귀찮은 일이다. 행여난 한 번이라도 본다면 고양이 따위는 당장 치우라고 할 것 같다.

고양이는 끊임없이 외친다.

나 이뻐?

전혀 예쁘지 않지만, 고양이는 열심히 먼 동네까지 가서 쥐를 잡아온다. 몇 년간 쥐를 잡아왔다.

그러나 사실 이 고양이는 예뻤다. 가만히 있어도 너무 예뻤지만, 끊임없이 나 이뻐 외치고 있다. 그래 너 예뻐... 예쁜 짓만 안하면...

난 그때 몰랐다. 이 예쁜 고양이가 새끼를 네 마리씩 낳고도 엄마 고양이로 우리 집에 붙어있던 것들은 끊임없이 물어오는 쥐 때문이었다는 것을...

에피소드 2. 나 밥 줘?

지금 우리 집에는 강아지 대신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도둑고양이였는데, 겨울에 떨고 있는게 불쌍해서 아버지가 밥을 몇 번 주니까 매일 왔단다.

두 노인네가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서 밥을 한다. 사실 그냥 사료를 줘도 되는데, 아직도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서 사료를 산다면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죄악이라고 두 노인네는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래서 밥을 한다. 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별 얘기 안한다.

정월에 집에 갔더니 어머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다.

글쎄, 도둑고양이를 그만큼 잘 해줬는데, 새끼를 낳더니 제일 예쁜 놈을 데리고 도망가버리드라고... 도둑고양이는 도둑고양이야... 옛날 고양이들은 안 그랬는데...

웃어 죽는 줄 알았다. 당연하다. 고양이는 새끼를 낳으면 어미는 도망가기 마련이다.

간단하다. 고양이의 인식 세계에서 '밥을 준다'는 개념은 없다. 그냥 그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이가 생긴다라는 인식 밖에는 없다.

고양이는 보통 세 마리에서 네 마리 정도 새끼를 낳는데, 젖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어미 고양이는 계산을 시작한다. 고양이의 생태학이다.

자기가 먹던 먹이를 네 마리가 먹을 수 있을까? 고양이 먹이느라고 필요 없는 밥도 하는 우리집 두 노인네가 설마 새끼들 밥을 안 줄라고...

그러나 고양이는 개보다는 훨씬 야생에 가깝다... 그걸 이해시켜야 하는데, 어미 고양이에게 밥 줄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하는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자기가 매일 먹던 밥을 네 마리가 나누어 먹으면, 당연히 모자라지... 고양이에게는 주인 개념이 없다. 개는 가출하지 않는다. 주겠지... 주인인데... 불행히도 고양이에게는 주인 개념이 없다.

젖이 떨어질 때쯤 어미 고양이는 가출을 한다. 새끼니까 두 마리 정도는 먹을 수 있겠지... 가장 강한 놈을 데리고 고양이는 가출을 한다. 남은 두 마리를 살리기 위한 끔찍한 모성이다.

그래서 이 의리 없는 어미는 키워준 공도 모르고 도망갈 뿐더러, 제일 예쁜 놈을 데리고 나간다. 왜냐하면 어미가 보기에는 그 놈이 제일 튼실해서 사냥도 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쥐가 많이 있다면 어미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자라면 사냥을 하면 되니까...

그러나 이제 서울에 쥐는 별로 없다. 우리 집에도 식구들이 줄면서 쥐도 줄었다... 두 노인네가 먹어야 얼마나 먹는다고, 쥐까지 키우겠는가.

그러니까 어미까지 키우고 싶다면, 새끼를 낳은 다음에 밥을 많이 줘야한다. 괜챦아... 너까지 키울 수 있어... 밥, 밥은 많이 있으니까 고민하지마...

물론 강아지를 키울 때에도 고민은 있다. 개는 새끼 낳을 때 누가 보면 새끼를 물어 죽인다... 슬픈 모정이다. 빼앗기거나 남한테 죽느니, 내가 안락사 시키는게 낫다... 이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고양이가 자기 생태계의 부양능력에 대해서 고민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에피소드 3. 오, 와일드 번치!

고양이는 정원이나 마당에서 키워야 한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장면의 추억이 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우리 집 식구들은 모두 바빴다. 아버지는 방통대를 다니느라고 바빴고, 어머니는 전국 교육위원에 임명되어, 소위 정치를 하느라고 바빴고, 나는 노느라고 바빴다. 동생들도 나름대로 노느라고 정신들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 정원은 아무도 가꿀 사람이 없었다.

장마를 지나고 나니까 잡초가 내 허리만큼 올라왔다.

이 허리만큼 올라온 무성한 잡초들 사이로 고양이 여섯 마리들이 뛰어다닌다고 생각해봐라... 아름다왔다. 와일드 번치가 따로 없다. 현관문만 나서면 우리집은 사파리였다.

그때의 아름다왔던 기억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 상황을 다시 구연하려면 정원이 있는 집에서, 손보지 않은 잡초덤불과 여섯 마리의 고양이가 필요하다.

나는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쟝글(!)'에서 자연을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집 정원의 후박나무는 강서구에서 가장 키 큰 나무이다. 섣불리 집 공사한다거나 팔려고 하면 삼십년씩 된 나무들이 아깝다... 솔직히 아깝다...

우리 집보다 좋은 정원을 가진 부자 아저씨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은 고양이를 키우는 것을 귀찮아한다. 가장 야성적이며 길들지 않는 그 키우기 편한 고양이를 말이다...

에피소드 4. 인내...

내가 서울에 돌아온 이후이다. 잠깐 집에 살았다.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은 도미 유학 중인 막내 동생이 고양이를 길렀다. 그 당시 막내는 한가했다. 전자 기타를 배운다고 기타 학원을 다니는 걸 제외하면 빈둥거리면서 집에서 먹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안했다.

형, 고양이가 참새 잡는 거 알아?

몰라, 어떻게?

고양이가 가만히 있거든... 몇 시간쯤 가만히 있으면 새들이 고양이인걸 까먹나봐... 점점 가까이 오거든... 그러다 적당히 가까와지면 확 잡지...

잘 잡아?

꼭 잡는 건 아니고, 두 번에 한 번 정도 잡는데, 못 잡으면, 다시 가만히 있어... 하루에 한 두 마리 정도 잡나봐...

근데,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봤거든...

멏 시간씩 참새를 잡기 위해 돌부처처럼 버티는 고양이도 대단한 놈이었지만, 그걸 며칠씩 지켜보고 있던 동생도 대단했다... 다들 정말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나부다.

막내의 얘기는 이런 거다.

어느날 고양이가 참새를 먹고 있더란다.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단다.

인내... 사람들은 다들 너무 바쁘다. 참새를 잡는 고양이의 인내를 배우고, 소일거리로 남들 괴롭히기 보다는 방안에 틀어박혀서 긴긴 여름날을 참새 잡는 고양이를 구경하던 나의 막내 동생이나...

인내를 배울 필요가 있다. 잠시도 심심한 걸 참지 못해서 누군가 괴롭히려는 사람에게 고양이의 사냥을 구경하라고 권해주고 싶다.

나도 막내를 따라서 고양이의 사냥을 보려고 했지만, 두 시간 정도 기다리다가 지쳤다...

형, 오늘따라 참새들이 잘 안 속아주는데?


에피소드 5. 불쌍해!

나락이라는 일본말에 자주 사용되는 약간 어려운 말이 있다. 밑도 끝도 없는 구렁을 나락이라 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라고 멋있게 표현하지만, 그냥 우리들 용어로는 ‘죽겠슈’라고 하는 게 그런 거다.

나도 이런 나락에 떨어져본 적이 있다.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끝없이 떨어져만 간다.

살려고 발버둥을 쳐보지만,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냥 추락할 뿐이다... 높이 나는 새가 오래 떨어진다고 했나? 나락... 다시는 그런 나락에 떨어지는 경험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어려울 때 고양이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정말 불쌍한 고양이에 대한 기억이 있다.

새벽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갔더니 고양이가 죽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정말 고양이 잡을 뻔 했다.

화장실 담을 타고 화장실 문을 멋지게 들어온 것까지 좋았는데, 화장실에는 창문 바로 밑에는 욕조가 있었다. 타일 욕조...

이 욕조에 그대로 다이빙한 거다. 물은 절반 정도 차있었는데, 천하의 고양이라도 타일 앞에서는 해볼 도리가 없이, 그렇게 물을 싫어하는 고양이가 욕조 안에서 허부적거리고 있는 셈이다.

기진맥진한 고양이를 들고 물을 닦아주면서 눈물이 흘렀다.

고양이, 탈진해서, 소리도 내지 못한다. 불쌍해서 눈물이 흘렀다. 고양이를 껴앉고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밖에서 키우던 고양이지만, 그날은 이불을 덮어주고, 꼭 껴안고 같이 잤다. 온몸이 얼어 있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무서웠지만, 실제는 너무 불쌍했다...

나락으로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욕조에 빠졌던 어린 시절의 고양이 생각이 났다.

누가 날 건져주지 않을까?

건져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나도 기력을 회복하고, 그리고 그냥, 별 거 아니었쟎아, 그냥 나락에서 걸어나왔다.

그러나 그 때의 고양이는 너무너무 불쌍했다. 고양이는 물을 제일 싫어한다.


에피소드 6. 방안의 기억

고양이를 여러 마리 키우다 보면, 새끼 때 귀엽다고 방안에서 키웠던 고양이와 귀찮아서 처음부터 밖에서 키운 고양이가 나뉘게 된다.

지금은 우리 집에도 에어콘이 있지만, 여름에는 언제나 고양이 때문에 말썽이다.

문을 열면, 어릴 때 방에서 지냈던 고양이들은 꼭 안방의 아랫목으로 쏜살같이 날아온다.

여기가 바로 집이야!

방안에서 지냈던 기억이 없는 고양이는 현관문이 열려도 집으로 들어오지 않지만, 따뜻한 겨울날 아랫목을 경험한 고양이들은 몇 년이 지났어도 마음 속의 고향은 안방 아랫목이다.

그때부터 난리가 난다. 이미 커버린 고양이를 안방으로 들이기는 어렵다.

예전에 도망가던 장농 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지만, 하여간 귀신같이 기억해낸다.

그러나 이미 덩치가 커져버린 어미 고양이는 장농 바닥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슬픈 목소리를 내면서 밖으로 끌려가지만, 언제나 고양이는 현관문이 열리기를 기억하고, 고향을 노리고 있다.

나도 그렇게 기회만 기다리면서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있는 것일까?

나에게도 그런 마음의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에피소드 7. 고양이와 놀기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안해 본 장난은 별로 없다. 강아지를 데리고 응용할 수 있는 '다방구', '술레잡기'를 다 해본 것처럼, 고양이와 놀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놀이는 다 해본 셈이다.

그 중에 가장 재밌는 놀이는 고양이에게 탁구공을 던져주는 일이다.

사실 고양이에게 탁구공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상당히 건방진 존재로 고양이 눈에는 보이나 보다.

쥐를 잡듯이 손톱을 세워서 탁구공을 덥쳐 보지만, 탁구공은 고양이 손에는 잡히지 않고, 탁 튀어서 저 멀리 가버린다.

그러면 고양이는 무안하다. 다시 탁구공을 노려본다. 1분 정도...

그리고 날렵하게 도약한다. 탁구공... 못된 놈이다. 그런 고양이의 노력을 무시하듯이 다시 튀어버린다.

탁구공이 쥐였으면... 아무리 쥐를 잘 잡는 고양이라도 탁구공을 잡기는 어렵다...

고양이는 하루 종일 탁구공과 전투하며 야성을 키운다. 고양이가 탁구공을 실눈을 뜨고 노려보는 건 유쾌한 즐거움이다.

쥐와 눈싸움을 하듯이 탁구공과도 눈싸움을 한다. 가끔은 튀어오르는 탁구공을 잡기 위해서 다른 손으로 탁구공을 쳐보기도 한다. 순간 응용동작이다. 테겐의 필살기인 연속 동작같은 걸 다섯 번에 한 번 꼴로 볼 수 있다...

그런 고양이의 끈질긴 탁구공과의 전투를 바라보면서, 내 눈빛은 살아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고양이만도 못하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사는 건 아닐까?


에피소드 8. 길들지 않는 고양이

고양이에게 주인 개념이 없다는 것은 개보다는 더 야성에 가깝다는 말이다. 늑대의 혈통에 가까운 개일수록 더욱 품종이 좋은 개라는 말이 있다. 진돗개는 일반개보다 늑대에 더욱 가깝다고 한다. 때로 생각한다. 그러면 늑대를 기르지 왜 개를 기르는 거야? 바보 같은 질문이다. 늑대는 사람도 먹이로 생각한다. 사람은 개를 먹이로 생각하지만...

아무리 오래 고양이를 길러도 고양이는 길드는 법이 없다. 조금 익숙해질 뿐이지만, 강아지처럼 이름을 불러서 오거나, 뭔가 훈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멍순이'라고 불렀던 내가 키워본 가장 멍청한 강아지가 종이팩에 든 우유를 먹게 둘째 동생이 훈련시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둘째 동생은 종이 팩을 열게 하는 것까지 훈련시키고 싶었지만, 그건 좀 무리였다. 어쨌든 멍숭이는 종이팩의 우유를 먹고, 팩을 찢어서 남은 우유를 핥아먹는 정도로까지는 되었다... 둘째 동생은 분무기를 가지고 훈련을 시켰다. 독한 놈이다. 그러나 그런 둘째도 고양이를 훈련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난 이 고양이의 야성이 좋다. 직장이나 구조는 사람을 순치시킨다. 길들인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바보로 만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미 고양이가 '지혜'롭게 새끼들을 위해서 떠나가듯이, 고양이는 야생을 간직하며 길들지 않는다.

지식인은 길들어져서는 안 된다.

한 조각씩 던져주는 고기조각에 길들어서 사는 강아지보다는 언제나 야성으로 남는 고양이에게 배워야 한다. 지식인들은 말이다...

성대를 끊고, 손발톱을 다 끊어도 고기조각만 때맞춰 던져주면 꼬리를 살랑살랑거리는 강아지를 바라보면서 나는 분노한다. 속으로부터 불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고양이는 길드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고양이가 좋다. 강아지 같이 살기보다는 다소 모자라고, 때론 불쌍한 고양이 편이 좋다.

에피소드 9. 나는 마당을 가지고 싶다...

언젠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난 한 뼘만큼이라도 마당을 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가 글자를 쓰게 되면 고양이 한 마리를 사주고 싶다.

때론 어떤 어른이나 선생님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을 한 마리 짐승이 가르쳐 줄 때도 있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며 사람들과 친해지는 방법보다는, 설령 주인의 손을 본의 아니게 할퀴어 미움 받지만, 당당하게 사람과 같이 사는 고양이의 삶을 배우게 해주고 싶다.

도시는 아파트와 콘크리트로 사람들 길을 들인다.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단독주택보다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 그 편이 편하고 돈도 될 거다.

그러나 그건 도시가 강아지로 주민들을 길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못사는 동네에서 그래도 한 뼘의 땅이라도 가지고, 그리고 흙내음을 맡고, 고양이도 키우고, 장마가 지면 잡초가 자기 키만큼씩 자라는 그런 마당을 나의 아이에게 주고 싶다.

내가 길들지 않고 살아온 것처럼 나의 아이도 길들이고 싶지 않다.

조기교육이나 과외 같은걸 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나는 자연과 우주를 호흡하면서, 별을 볼 수 있는 작은 마당을 주고 싶다.

마당이 있어서 고양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서 마당을 갖는 거다... 내가 살아가는 도시의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어느 선생님들보다도 나의 고양이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배우게 해 주었다. 고양이는 결코 길들지 않는다.




-끝-



 우선 꽤 긴 분량의 이 글을 읽은 당신께 감사의 인사부터 전하고, 이 글에 대한 내 생각을 조금 말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거칠게 말해보자면, '아무나 쓸 수 없는 글이지만, 또한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다. 다 읽어보았다면 알 수 있듯이 이 글에는 우석훈 씨만의 삶이 녹아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그 관찰된 대상에 대하여 이렇게 힘을 뺀 채 유유히 써내려가는 작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없는 글'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은 '88만원 세대'의 저자이자 성공회대 교수로서 쓴 글이 아니라, 고양이와 수십년을 같이 살아온 '우석훈'이라는 개인이 쓴 글이다. 자신의 삶, 자신의 경험을 꾸준히 되묻고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또한 주위의 것도 품어 안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다.

  난 아직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이렇게 세심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아직 나에겐 없다. 그래서 이런 글을, 이런 삶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준 우석훈 씨에게 큰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 세상 만사 어찌 알겠는가. 내가 또 언제 어디서 이 세상을 담담히 크로키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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