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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29 '같이 밥이나 먹자' ㅡ 그 약속의 기술 7

'같이 밥이나 먹자' ㅡ 그 약속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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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와 얼굴본 지는 오래 됐고 반가운 마음에 약속을 잡고 싶을 때 보통 '같이 밥이나 먹자'라는 말을 애용한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 같다. 만남의 약속에 다른 많은 일들도 있을 수 있는데 왜 하필이면 '밥'일까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1. 남녀노소 구분없이 '모두'가 하는 일이다.
2. 일과 중 반드시 해야 할 행위이다.
3. 가장 본질적인 행위를 나눈다는 의미가 있다.
4. 행위 도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5. 보통 식사 약속은 1시간~2시간 정도로서 정상적인 직업을 가진 경우에 가장 적당한 시간이 걸리는 행위이다.
6.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경우 양쪽이 만남 그 자체로 즐거울 수 있다.
(7. 간혹 어떤 이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사를 혼자 하기 싫다는 이유로 밥 먹자는 약속을 잡는 경우도 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나 많은 이유가 있다. 별 생각없이 단순하게 하는 관습적인 행동 하나가 사실은 복잡하면서도 합리적인 이유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밥이나 먹자'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다른 말은 없을까? 위의 조건들을 고려하며 하나씩 생각해봤는데, 신통치 않은 것도 있고 그럭저럭 쓸만한 것도 있다.


1. 같이 잠이나 자자


     잠을 자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이고 무조건 해야만 하는 행동이다. 또한 (수학여행, MT, 친구집 등지에서 경험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같이 잠자리에 누웠을 때의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고해성사'을 위한 최적지이다. 서로 같이 누워있음으로써 본질적인 행위를 나누고 있기도 하며, 깜깜한 주위와 밤의 은밀한 분위기는 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도록 한다. 정말로 이런 약속을 잡는다면 내 집이나 상대방의 집에 저녁 혹은 밤부터 방문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잠자리에 들기 이전의 시간도 유의미하게 보낼 수 있다. 여려모로 괜찮은 대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이 둘 이상이 눕기에 너무 좁거나 이성 간의 약속일 경우에는 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물론 이성이라도 공간 분할을 하고 잘 수 있겠지만, 그건 '같이 잠이나 자자'는 약속이 가지는 장점을 다 없애버리는 행동이다. 그래서 동성 친구 혹은 선/후배에게 자주 쓸만한 말이다. '야, 같이 잠이나 자자!'


2. 같이 돈이나 쓰자


    주위에서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는 경우이다. 같이 돈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소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위에서 언급한 조건 중 6번, 만남 그 자체로 즐거움을 동반하는 행위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돈 쓰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거의 없다. 돈이 없어서 문제지.

    보통 친한 친구 간에 많이 발생하는 유형이고, 나아가서는 연인 사이의 데이트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데이트는 '밥이나 먹자'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돈이나 쓰자'이다. (사실 '돈이나 쓰자' 역시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 근본적인 목적으로 향하는 경우가 있으나, 19세 미만도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알아서 생각하자.)

    친한 친구나 연인과 같이 이런 약속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돈'이라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가 맞긴 맞나보다. 얼굴만 대강 아는 사람이랑 같이 '돈이나 쓰자'고 얘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3. 같이 똥이나 누자


    요즘 똥 홀릭에 빠진 내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밥이나 먹자'보다 훨씬 본질적인 행위를 나눈다는 점에서 임팩트가 아주 크다. '똥이나 누자'는 같이 뒷간에 앉아서 서로의 고통과 희열을 느끼며 서로가 가진 인간의 내면을 엿볼 수 있는 유의미한 행위이다.

    하지만 단점이 너무 많다. 일단 장 트러블 혹은 복부 압박의 타이밍을 서로 맞추기가 어렵고, 행위 그 자체로서 '불쾌'하다. 더구나 성별이 다른 경우에 같은 장소에서 이 행위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이루어지는 시간도 너무 짧다는 흠이 있다.

    그래도 '똥누는 약속'은 돈이 안 든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전부 다 돈이 필요한 행위였다면, 똥 누는 것은 깨끗하고 좋은 화장실을 물색하기만 하면 된다. 일종의 '반 자본주의적' 행태로서 자본주의에 심하게 반대하는 동지끼리 할 수 있는 상징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정말 친한 친구 간에도 가능하고, 이 행위가 한 번만 이루어지면 그 우애는 천금을 주고도 못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약속을 잡는 걸 아직 보거나 들은 적은 없다. 가끔 TV에 보면 '똥'을 누는 건 아니고 '화장실'을 약속의 장소로 잡는 경우도 있긴 하다. 특히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껌 좀 씹던 형님들이...


4. 같이 숨이나 쉬자


    이 방법도 내가 고안했다. 약속 장소를 정한 뒤 그 곳에서 말도 하지 않고 여타의 다른 행위 없이 같이 '숨만' 쉬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아주 낭만적인 만남이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의 호흡 만을 느끼며, 그 호흡 속에서 서로의 눈빛과 마음과 생각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방법 역시 돈이 안 든다는 아주 큰 장점이 있다. 하지만 우선 이런 약속을 잡기에는 서울의 공기가 탁하다는 점이 우려스럽고, 정서가 불안하거나 다혈질인 사람이 아니라 차분한 성격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행여나 이런 약속을 잡으면 다른 사람들이 이 둘을 미친 것으로 알거나, 아니면 둘의 성별과 관계없이 연애하는 것으로 이해할테니 웬만하면 인적이 드문 곳에 약속을 잡는 게 좋다.

    '같이 숨이나 쉬자'라는 말이 너무 낭만적이라서 건네기에 부끄러우면, '같이 눈이나 깜빡이자'와 같이 재치있게 제안하는 방법도 있으니 잘 알아두자. 혹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낭만적으로 이런 약속을 하고 싶으면 '같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자'라는 방법도 있으니 이 말도 같이 알아두자.



    이외에도 '같이 몸이나 씻자', '같이 생각을 하자', '같이 언성을 높이자' 등과 같은 방법이 있으나, 그 실용성과 참신성 면에서 위의 네 가지 방법에 미칠 바 안된다.

    그래도 '같이 밥이나 먹자'가 제일 무난하고 괜찮다는 것으로 결론이 날 것 같다. 혹시나 '같이 밥이나 먹자'는 말이 너무 식상하게 느껴지고 그와는 다른 색다른 약속을 잡아보고 싶은 사람들은 위의 네 가지 방법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맞춰 적절히 사용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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