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영화, 음악.'에 해당되는 글 6

  1. 2010.04.17 용서
  2. 2009.02.17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 28
  3. 2009.02.03 W ㅡ 짧고도 오래 기억될 그들의 기록 2
  4. 2009.01.05 증여론 中
  5. 2008.06.30 영화「블러디 선데이」를 통해본 6.29 유혈 사태 10

용서



  한 꼬마가 있었고, 세월의 벽을 넘고 그가 사랑한 한나가 있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꼬마가 대신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리고 여느 사랑처럼 그들은 부적절한 타이밍에 헤어졌고, 몇 년 뒤 유태인 수용소의 경비원이자 한 명의 전범으로서 재판장에 선 한나를 꼬마는 발견한다. 꼬마는 어떠한 이유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감옥에서 조금은 부당한 20년을 보낸 뒤 자살한다. 남긴 유언장에는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죄의 말이 있었다.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소녀에게 보내는. 그 사죄의 표시는 찻통에 든 7000 마르크였고, 그 소녀는 7000 마르크는 되돌려준 채 찻통을 받는다. 그 찻통을 전해주면서, 이제는 중년의 변호사가 된 그 꼬마도 한나와 자신을 용서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는 펑펑 울었다. 꺼이꺼이 운다는 게 어떤 건지 올해 들어 자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 아니라 '용서'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도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발끈을 푸는 일처럼 용서도 당연해진다. 7000 마르크를 자신에게 넘겨주라고 했다는 한나의 유언에 어이없어 하던 소녀도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들을 보관하던 찻통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한나를 용서했다.

  짧은 내 인생에도 두 번의 용서가 있었다. 거대함이었던 사람에게 한 번, 따뜻함이었던 사람에게 한 번. (물론 나에게 그들을 용서할 권리가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용서에 떳떳하다.)

  용서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었다. 용서를 했다고 생각해도 아직 온전히 용서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다. 용서는 참으로 꺼내기 무거웠다. 그렇지만 난 그의 눈물과 후회와 한탄을 봤고, 그녀의 어질러진 책상, 마구 던져진 가방, 금방 사온 빵이 담긴 봉지와 너무도 작은 손을 느꼈다. 참, 산다는 건 우습다. 사람은 찻통이나 빵처럼 별 거 아닌 것들에서도 다른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체취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너무도 쉽게, 용서하게 만든다.

  여전히, 용서의 기억은 아프고 쓰다. 찻통을 받아들고 기운차게 뒤돌아서는 소녀는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그래, 당신도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성통곡을 하게 만드는 게 용서인데... 

  그렇지만, 당신도 그렇게 당신답게 살아가야 하듯이, 나도 나답게 살아가야지... 용서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또 한 번 나를 안아주는 것 뿐. 이 끝없는 바보스러움에 괴로워하는 나를, 나는 안아 줄 수 밖에 없다. 두 팔을 쫙 벌려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

  
 
    나 같은 경우, 영화를 보기 전에 조그만 정보도 들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알고 보는 경우 재미를 반감시키기 때문인데, 정보를 듣고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기도 한다. 그래서 주로 '전체적인 평(좋다/나쁘다)'과 '느낌'에 의존해서 영화를 고른다. 소문이 좋은 영화는 대개 보는 편이고, 소문이 없더라도 제목과 포스터에서 느낌이 오는 영화는 통과!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도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지니지 않은 채 지난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보았다. 이 영화는 우선 제목의 느낌이 좋은 경우고, 결정적으로 믿고 보는 '브래드 피트 표' 영화이기 때문에 주저없이 보았다.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던 고등학교 시절, 영화 마니아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소위 '브래드 피트 빠' 였다. 난 그냥 잘 생긴 배우로만 알고 있었지만, 그 친구 얘기를 들어보면 단순히 얼굴만 잘난 놈이 아니었던 것. 이후에 그의 영화를 한 편 한 편 보다보니, 그렇게 얘기할 만 하구나 싶었다. 특히 "파이트 클럽"은 내가 꼽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


    (보고나서 안 사실이지만,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 낸 '데이빗 핀처'가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 원래 난 할리우드 감독, 배우 이런 쪽에 별로 관심이 없는데 이 감독이 '세븐'과 '조디악'을 연출한 감독이라니 좀 놀라웠다. 그런 영화를 만들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 영화를? 그리고 내가 얼마나 정보를 차단시키는가 하면, 난 이 영화의 감독이 '팀 버튼'일 것 같다는 예감으로 끝까지 관람했다. ㅋㅋㅋ 주인공 이름도 '벤자민 버튼'인데다가, 영화 느낌도 비스무리해서. 영화를 보기 전에 '벤자민 버튼'이 혹시 영화 감독은 아닐까 생각했던 건 이 블로그에 들어오는 분들께만 알려드리는 비밀. 쉿!)

    영화는 정말 좋았다. 볼 때보다 보고 난 뒤가 더 좋고, 보고 난 직후보다 한참 뒤에 더 기억에 남는 영화다. 그저께 친구랑 인생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꾸 자꾸 이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가 내게 준 '울림'의 증명이다. 그 '울림'은 표면적인 재미와 감동을 넘어서는, 인생에 관한 '성찰'이었다. 고작 스무해 남짓 살아온 젊은이에게 '죽음'과 '40년, 60년 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다면, 충분히 훌륭하지 않을까?

    (자, 지금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담겨있을 수 있다. 원체 리뷰에는 줄거리를 쓰지 않는 타입이라 영화를 보는 데 크게 지장받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안 읽고 보시는 게 좋을 듯. 이 영화의 상세한 줄거리와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은 '아침해쌀 님의 리뷰'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하다.)


    이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에 태어난 벤자민 버튼의 일대기를 다룬다. 물론 영화제목 처럼 그 남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의 친부는 쭈글쭈글한 노안과 온갖 잡병들을 달고 태어난 아기를 어떤 양로원 문앞에 버리고, 그 양로원의 주인이 '남들과는 다를 뿐인' 이 아기를 키우기로 작정하면서 그의 인생은 비로소 시작된다. 

    잔잔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나름 '반전'이 존재한다. '기이한' 벤자민 버튼도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다가 '똑같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설정이 바로 그것이다. 관객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의 초반부는 '참을성'을 요구한다. 노인의 얼굴을 하고 태어나서 소년의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에게 관객은 동정심을 느낀다. 한창 귀엽고 예쁜 나이에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는 벤자민 버튼이 얼른 '젊음'을 되찾고 남들처럼 정상적으로 살 수 있기를 관객들은 내심 바라며, 그 순간을 참고 기다린다. (그 이면에는 얼른 브래드 피트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도 꽤 큰 듯. ㅋㅋ)


     자기 일을 가지게 되고 첫사랑에 빠지는 벤자민 버튼을 보며 관객들은 '바로 이거야!'라고 외치게 된다.  결국 벤자민 버튼은 드디어 '브래드 피트'의 얼굴이 되고 '젊음'과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이제 벤자민 버튼이 빛을 보겠구나, 행복해지겠구나'라고 생각하지만, 바로 관객들의 그런 예측 사이로 영화의 '느릿한 반전'이 스며든다. 아무리 젊어지고 피부가 탱탱해져도, 벤자민 버튼 역시 '시간'과 '죽음' 앞에서는 똑같은 인간에 불과해진다. 남들의 기준에서는 '더 젊어지는' 인생이겠지만, 벤자민 버튼에게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더 늙어지는' 과정이다.

    벤자민 버튼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힘든 노년을 보내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관점에 따라서는 벤자민 버튼이 더 불행하게 죽지 않았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인간의 죽음이란 대개 그러하다.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자의식을 버려가는 과정은 보통 인간들의 죽음과 닮았다.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의 예상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느릿한 반전'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또 언급하고 싶은 건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이다. 소설가나 영화감독은 내러티브 속에 자신들의 의도를 행위하는 '긍정적 인도자' 를 등장시키곤 한다. 이들은 주인공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사람의 행위는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는 어떤 인물이 '긍정적 인도자'의 역할을 맡았을까?


    아마 영화를 보신 분들은 고민이 클 것 같다. 엄마인 퀴니? 부인인 데이지? 아니면 간지나는 선장? 인생 역전의 러시아 부인? 혹시 벤자민 버튼? 내 생각에 그 모두가 정답이다.  이 영화는 '긍정적 인도자'들로 가득차 있다. 감독의 의도가 '인생'을 보여주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모두가 '긍정적 인도자'가 될 수 있다. 나아가 그들 모두가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며, 이것이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이다. 


    '괴물'처럼 생긴 벤자민 버튼을 사랑으로 키우는 퀴니도, 노인처럼 생긴 꼬마 벤자민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데이지도, 벤자민 버튼에게 노동과 모험심과 용기를 가르쳐준 예술가 선장(♡ <ㅡ 개인적 애정의 표시ㅋㅋ)도, 젊을 때 도전했다가 포기해버린 영국해협 도해를 최고령 신기록으로 이루어낸 러시아 부인도 모두 주인공이다. 벤자민 버튼이 기이한 인생을 살기는 했지만, 아마 저 가운데 어떤 인물이 주인공이었더라도 이와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기이함'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라 그의 태생적 기이함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똑같이 지낸 삶'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벤자민 버튼이 죽음을 맞이하듯, 이 영화에서 그와 관계맺는 대부분의 인물들 역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감독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등장인물들을 '죽이려고' 애쓴다. 아빠 버튼은 늙어서 죽고 선장은 일본군이랑 싸우다 죽고 퀴니는 죽는 지도 몰랐는데 죽고 데이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해주고 죽는다. (뭐, 번개에 7번맞고 안 죽은 노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ㅋㅋ) 즉, 이 영화는 결국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삶'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씩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이유도 바로 그 점에 있다.


"누군가는 강가에 앉기 위해 태어난다. 누군가는 번개에 맞고, 누군가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누군가는 예술가고, 누군가는 수영을 하고, 누군가는 단추를 만들고, 누군가는 셰익스피어를 읽고, 누군가는 그냥 엄마다.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춘다."



    의아한 점은 벤자민 버튼이 어떻게 살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벤자민 버튼은 어떻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지금까지 보지 않았는가? 2시간 40분동안 정줄놓고 보던 것이 바로 벤자민 버튼의 일생이었으며, 그는 그렇게 살았다.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는 거꾸로 살았다' 정도가 아닐까. '노인으로 태어나 아이로 죽은 것'은 퀴니가 말하듯이 그저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의 방식일 뿐이었다.

"넌 남들과 다를 뿐이야, 사람들이 이해를 못할 뿐이지."

    그에게도 시간은 똑같이 흘렀고, 탄생하여 젊음의 기쁨을 누리고 노년에 인생을 정리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일생의 여로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기뻐하고 슬퍼했으며, 사랑하고 헤어졌다. 그의 시계는 단지 거꾸로 돌고 있었을 뿐, 흐르는 시간의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인 동시에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똑같이 간다"이다.


    영화평을 한 문장으로 줄이자면 - 시간의 무거움, 인생의 소중함을 억지스럽지 않게, 한 남자의 일생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는 아주 좋은 영화였다. 아마 또 보러 갈 것 같다. 또 보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틈틈이 챙겨보는 영화가 될 것 같다. '고전(古典)'의 한자 모양을 풀이하면 '오랫동안 책상 위에 올려두고 늘 열심히 읽는다'는 뜻을 가진다. '영화로서 얼마나 잘 만들어졌나' 를 넘어서서 '내게 얼마만큼의 영감을 주는가'라는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적어도 나에게는 '고전', '클래식'이 될 영화다.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때, 난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덧1) 나이를 먹으신 어르신 분께서 쓰신 리뷰를 보고싶다. 분명히 젊은 놈이 본 바랑은 다르게 영화를 봤을 것 같은데. 볼 수 있을까나?


덧2) 이 영화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장면들로 가득하다.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부분!) 특히 나는 '바다'와 '바닷사람'에 대한 로망이 있어서 선장과 만난 이후부터 펼쳐지는 장면들에 큰 인상을 받았고, 또 벤자민 버튼이 가족을 떠나 세계 여행을 다니는 장면도 너무 아름다웠다. 안 그래도 요즘 여행 떠나고 싶은데, 불을 질러라 질러. ㅠ_ㅜ

덧3) 더 좋은 명대사들이 있는데, 그런 건 감추고 감추었다. 영화를 보면서 직접 보시라! 영상과 언어의 절묘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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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ㅡ 짧고도 오래 기억될 그들의 기록

 


   「세계를 보는 새로운 창 W (이하 W)」를 마침내 읽었다. 꼭 보고 싶었는데 사자니 조금 아깝고 해서 도서관에서 대출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빌려보았다. (왜 사기엔 아까웠는지, 그 이유는 커밍 순.)

    TV 프로그램을 활자물로 출판하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있었다. 고등학교 때 '역사 스페셜' 시리즈를 통해서 그런 류의 책을 처음 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기억하기로는 상당히 알찬 구성이었던 것 같다. 이후에는 EBS의 '지식채널 e' 시리즈를 모아 찍어낸 「지식e」시리즈를 읽었다. 이 책은 5분짜리 영상에 따뜻한 감성과 영상미를 담으려고 했던 TV 프로그램의 의도와 그 장점을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에서는 방송에서 소개되지 못한 관련 배경 지식도 소개되어서 유익하게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W의 장점은 본래의 프로그램이 가지는 탁월함에 기인한다. W는 '지역에서 활동하나 세계적으로 사고하는' 세계시민사회적 마인드를 바탕에 깔고 세계 각국의 사회 현상들을 현장감있게 전달한다. (계속 쓰면서 단어들이 좀 어색한데, 사실 아르샤빈의 아스날 이적 문제때문에 잠을 잘 못자서 단어들이 조합도 안되고 생각도 안난다. ㅠ 그깟 공놀이 ㅠ) 그 내용들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제작팀이 책 서두에서 밝히듯이 앉아서 책 뒤지고 인터넷 뒤져서 '~이러이러하다더라'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내용이든지 발로 뛰어서 직접 보고 들은 그대로를 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W의 내용들은 살아있다. 좀 더 관용적으로 표현하자면 생생하다. 여기서 각주달고 저기서 편집하고 이리저리 헤지고 터진 내용이 아니라 그 사회의 '팩트(fact)'를 사실적으로 전달해준다.

    하지만 이러한 W의 장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TV 프로그램의 영상에서 보여지는 생생한 현장감은 책에서 상당 부분 상실된다. 방송이나 다름없이 책에서도 생생한 사실들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현장감의 전달에 있어서 TV프로그램에 훨씬 뒤떨어진다. 현장성을 주기 위하여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사진도 아니고 영상캡쳐도 아닌 무언가들은 오히려 독서의 몰입도를 떨어뜨린다. 책을 읽다보면 어떤 내용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지는데 그 '무언가들'은 그런 호기심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무언가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갈증에 콜라를 마신 것처럼 더 목이 타는 느낌이다. 또한 그 '무언가들'이 등장하는 빈도는 일반적인 책에 비해서 잦고 어떤 것들은 한 페이지를 다 잡아먹을만큼 크기도 커서, 활자를 읽는 진행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도 저도 아닌게 되어버린 셈인데, 내가 예전에 봤던 이런 류의 책들과 비교해보면 그 단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우선 '역사스페셜' 시리즈는 본래 영상보다는 텍스트(콘텐츠? '다루는 내용'에 정확한 대응이 되는 단어를 잘 모르겠다. 아무튼 여기서 텍스트는 '영상 텍스트'를 포함한 창작물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서술되는 내용만을 뜻한다.)에 비중이 큰 TV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책에서도 영상보다는 텍스트에 큰 비중을 두었다. 읽다보면 이 책이 원래 TV 프로그램이었다는 생각을 잊을 정도로 내용에 충실했다. 

    또한 '지식e' 시리즈는 책에서 텍스트 자체보다는 원래의 영상이 가지는 느낌을 전달해주려고 노력했다. 지식채널e에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귀기울이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작팀이 언급했듯이 '영상시'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다. 또한 한 챕터의 전반부에서는 방송의 영상을 절묘하게 책에 표현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내용과 관련된 배경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영상과 텍스트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한다. 이런 책들에 비하면 W는 TV 프로그램의 영상과 텍스트를 책에서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TV 프로그램의 텍스트를 더 보충해서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든지, 아니면 방송의 영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중점을 뒀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W라는 책이 가지는 가치의 '일회성' 문제도 생각해봐야 한다. W는 국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해외의 사회 현상들을 가장 발빠르게 전한 책이다. 때문에 W는 가장 시사적인 동시에 그만큼 일회적이다. 누군가가 2, 3년 뒤에 이 책을 처음 본다고 가정하면, W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는 있을지언정 내가 느꼈던 것처럼 '책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르기 때문에 2, 3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흐른다면 W가 전하는 현상들은 그 시의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W가 전하는 내용들을 다른 매체나 저작물에서 활용한다면, 2, 3년 뒤의 독자가 본 W는 여기저기서 들어본 내용들로 가득할 것이다. 

    따라서 W는 다른 일반 책들에 비해서, 심지어 TV 프로그램을 각색한 '역사 스페셜' 시리즈와 '지식e' 시리즈에 비해서도 수명이 짧은 것으로 보인다 . TV 프로그램이 계속 되는 동안 2편, 3편이 나와서 W의 손자뻘이 출판되더라도 그 '일회성'의 문제는 여전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사지 않은 이유다. 두 번 볼 책은 아닌 것 같았다. 차라리 TV 프로그램을 또 보면 또 봤지.)

    하지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W는 좋은 책이다. 1) 무거운 내용이지만 쉽게 읽히고 2) 따뜻한 마음을 기르게 하고 3) 사회적 고민의 시작점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W의 시사성에 한계가 있더라도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하여 더 고민하고 더 조사해본다면 그 문제의식은 일회성에서 탈피된다.

    결정적으로, 가깝고 먼 미래에 W에서 소개하는 사회 현상들의 외면적 양상은 바뀌어 있을지라도 내적인 갈등 구조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또한 그 갈등 구조는 또 다른 현상에서 재현될 것이다. 예를 들어 W에서 다뤘던 각 국의 도시 빈민 문제와 절대 빈곤 문제는 몇 십년 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해결이 요원한 문제이다. W에서 소개한 바로 그 나라가 아니라 그 옆 나라에서 또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또한 이라크 난민 문제 역시 아빠 부시가 전쟁을 일으킬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이며, 난민 사이의 계급 격차는 H.G.웰즈의 소설「타임머신」에서 묘사된 미래 세계를 연상시킨다. 해맑게 웃으며 고통을 모르는 지상의 인간과 힘겹게 노동하고 고통받는 지하의 인간. 1895년에 쓰여진 소설에서 묘사된 모습은 이라크 난민들의 모습, 그리고 더 크게는 전지구의 인간들이 겪고 있는 갈등과 흡사하다. 갈등 구조는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반복되고 재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고나니 마치 결론이, 내용은 좋은데 책에선 잘 전달하지는 못하니, 닥치고 본방이나 사수하라 - 이런 말인 것처럼 들린다. 맞다. (ㅋㅋ) 그래도 책보다는 TV 프로그램의 전달 효과가 더 커보이니 가급적이면 본방 혹은 재방 혹은 검은 경로의 무언가를 보면 좋겠고, 시간과 장소 등 여러 여건이 충족치 못하여 프로그램을 자주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일독을 권해본다.




    덧) 이 책과 연관시켜 읽어볼 만한 책은 쉐일라 코로넬 外 지음의 「The News: 아시아를 읽는 결정적 사건9」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음의「르몽드 세계사: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지구적 이슈와 쟁점들」이 있다.

    '더 뉴스'는 9명의 아시아 기자들이 쓴 아시아의 중요한 9가지 사건들을 엮은 책이다. 지금은 MB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KBS TV 프로그램 "TV, 책을 말하다"에서 소개된 바 있다. 우리는 국내의 문제 혹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의 문제에 관심이 많은데, 이 책을 통해서 아시아의 저널리즘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르몽드 세계사'는 104개의 핵심 키워드를 추려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전지구적 문제를 심층적, 균형적으로 전달한다. 국제 문제에 대한 백과사전 혹은 어릴 적에 학교에서 줬던 '사회과 부도' 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다. 하나의 키워드에 대하여 여러가지 표와 그림을 제시하여 설명한다. 여기 저기서 글을 쓰는 데 자료로서 활용도가 높을 것 같다. 다만, 가격(정가 25,000원)이 조금 압박이다. 


    뭔가 설명이 틀에 박힌 것 같고 명확하지 못하다고?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ㅋㅋ) 지금 읽고 있는 가벼운 소설 하나만 읽고 나면, 이어서 볼 예정이다. 아마 다음 책 관련 포스팅은 W와 '더 뉴스'의 내용을 비교하여 써볼 것 같다. 그 글에서는 형식과 기술 방법을 주로 이야기하는 이 글과는 다르게 W의 내용에서 보이는 아쉬움을 좀 다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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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론 中




p.80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계약, 넥숨, 소송(actio)이라는 말의 기원인 '유사-범죄(quasi-delit)'와 관련된 모든 이론이 좀 더 분명히 이해된다. 단순히 물건을 갖는다는 사실만으로 물건을 받은 자는 물건을 준 자에 대해서 유사 죄인의 상태, 정신적인 열등감, 도덕적으로 불평등한 상태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p.89-90

브라만법의 몇몇 원칙들인 기묘하게도 이미 설명한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그리고 아메리카의 몇 가지 관습과 유사하다.

(중략)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베푸는 호의에도 화를 낼 만큼 귀족으로서의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한다. 《마하바라타》의 두 절에서는 위대한 예언자들인 일곱 명의 왕과 사병들이 슈비(Cibi)왕의 아들의 육체를 먹으려고 할 정도로 기근에 빠져 있을 때에도, 샤이비아 브르사다르바 왕이 준 엄청난 선물과 훌륭한 무화과도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오 왕이시여, 왕들로부터 받는 것이 처음에는 꿀처럼 달지만 마침내는 독이 됩니다.


이것은 증여로 인해 증여자와 수증자 간에 맺어지는 유대 관계가 대단히 강력해진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모든 체계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그것들보다 더 강하게 한쪽이 다른쪽에게 강하게 구속되는 것이다. 수증자는 증여자에게 종속된다. 이러한 이유로 브라만은 '받아서는' 안 되며 또한 왕에게 간청해서는 안 된다. 또 한편으로 왕의 입장에서는 주는 방식이 주는 사실 만큼이나 중요하다.

p.98   중국법.

(전략)
 
황 신부는 판 사람이 산 사람에게 넘겨주는 '애도증서(哀悼證書)' 모델들을 기록했다. 그것은 물건에 대한 추구권으로 사람에 대한 추구권과 섞여 있다. 즉 물건이 결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자산이 되고 '취소할 수 없는' 계약의 모든 조건이 이행된 뒤에도 판 사람은 오랫동안 물건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것이다. 비록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양도된 물건으로 맺어진 인연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계약 당사자들은 영속적인 상호 의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p.99 쪽부터 이어지는 결론 전부.

p.110  2. 경제사회학적, 정치경제학적 결론 중에서

어떤 동일한 동기가 트로브리안드 섬의 추장, 아메리카 인디언의 추장, 안다만 섬의 추장 등을 자극하고, 과거의 관대한 힌두인과 게르만족, 그리고 켈트족 귀족의 증여와 지출을 부추겼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인이나 은행가 또는 자본가의 냉정한 동기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들 문명도 이익을 추구하지만 현대사회와는 방식이 다르다. 재산은, 지출하기 위해서,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 '충복'을 얻기 위해서 모은다. 한편 교환을 하지만, 교환의 대상물은 사치품이나 장식품 또는 의복이거나 즉시 소비되는 물건이나 향연을 베풂으로서 이루어진다. 받은 것 이상으로 갚지만, 이것은 처음의 증여자나 교환자를 압도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지연된 소비'로 인해 자신이 입은 손실을 보충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얻어내는 이익은 우리를 이끌어내는 것과 유사한 것에 불과하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북아메리카(동부와 대평원 지대) 사회의 하위 집단들 안에서 각각의 씨족 생활을 지배하는 비교적 무정형적이며 비타산적인 경제 체계와, 셈족과 그리스인으로부터 시작된 이래 우리 사회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겪어온 전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고 개인주의적인 경제 체계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경제 제도와 경제적인 사건이 배열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기존의 이론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경제 합리주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윤이라는 말은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그것은 부기 용어, 즉 장부에서 징수해야 할 임대료 맞은 편에 기재한 라틴어의 interest에서 유래했다. 아주 향락 추구적인 고대 도덕에서조차도 행복과 쾌락을 추구했던 것이지 물질적인 효용성을 추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득(profit)과 개인(individu)이라는 개념들이 널리 유포되고 원칙의 수준에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합리주의와 상업주의가 승리해야 했던 것이다.
 
  서양 사회가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적인 동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직은 우리 모두가 이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민중 속에서나 엘리트 사이에서도 전적으로 비합리적인 지출은 관행처럼 시행되었다. 그것은 여전히 귀족계급들에게 남아 있는 풍습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것이다. 즉 도덕적인 인간, 의무를 다하는 인간이 지난 시간의 인간이었고, 과학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이 앞으로 다가올 인간인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매우 오랫동안 다른 존재였다. 인간이 계산기같이 복잡한 기계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아직은 이 끊임없는 비정한 이해타산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중략)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성실하게 노동을 수행함으로써 평생 동안 정당하게 보답을 받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는 것보다 일을 잘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없다. 생산하는 교환자는 자신이 생산한 것과 노동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것을 교환하고 있으며, 자신의 시간과 생명을 주고 있다고 다시 느낀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증여에 대해서 적절하게 보상받기를 원한다. 그에게 이러한 것을 보상해 주지 않으면 그는 일을 게을리할 것이며 이것은 생산성 저하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p.115-  3. 일반 사회학적, 도덕적 결론 중에서.

이것은 주제 이상의 것, 제도적인 요소 이상의 것, 복합적인 제도 이상의 것, 심지어는 종교나 법, 그리고 경제 등으로 나누어지는 제도적인 체계를 넘어서는 것으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전체적인 사회인 것이다. 우리는 전체를 고찰함으로써만 그 본질, 전체의 움직임, 살아 있는 부분, 사회와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의 상황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의식하는 순간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연구의 장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첫째는 일반성이다. 일반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 사실들은 다행히도 여러 가지 제도나 그 제도들의 다양한 주제보다 더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성이라는 장점을 들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해 사회적인 실상 자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사회들은 현대 유럽 사회를 제외하면 모두 분절 사회들이다. (중략) 이러한 때에도 많은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당한 기간, 우리 눈에는 미친 짓처럼 보이는 지나치게 후하고 기묘한 정신상태에서 서로 만났다. 

(중략)

원탁의 기사들처럼 공동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둘러앉을 수만 있다면, 국민, 계급, 가족, 개인 등은 부유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 무엇이 선이고 행복인가를 찾기 위해서 멀리까지 갈 필요가 없다. 그것은 주어진 평화 속에, 공동체와 개인이 서로를 보완해 갈 수 있는 리듬이 있는 노동 속에, 또한 교육으로 가르치는 상호 간의 존중과 호혜적인 너그러움 속에서 축적되고 재분배되는 부 속에 있는 것이다.

<끝> 


영화「블러디 선데이」를 통해본 6.29 유혈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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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공수부대의 총격에 거리 시위를 하던 아일랜드 시민들이 하나둘씩 고꾸라진다. 아일랜드 시민들은 공포와 충격에 휩싸여서 여기저기로 도망가지만 영국군이 쏜 총알은 그들을 차례차례 명중시킨다. '설마 맨몸으로 나가는데 쏘겠어' 하는 생각도 잠시, 어느새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한다. 학살이 끝난 후의 거리는 피와 시체 뿐이었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1972년 1월 30일 일요일 비무장 시위를 벌이던 아일랜드 데리 시민 열 세명이 영국군 총에 맞아 사망한 역사를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는 독립을 이루어냈지만, 북아일랜드 지역은 여전히 영국의 통치 하에 있었다. 여기에 아일랜드가 반발하며 신교도-구교도의 분쟁도 함께 발생하여 결국 '피의 일요일'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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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사건을 담담히 바라보는 시점이 인상적이다. 영화 내내 사건의 동요에 따라 흔들리는 16mm 핸드헬드 카메라는 사건의 사실성과 긴박함을 더해준다. 또한 사건에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데에 영화는 집중한다. 즉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고 영화는 사건의 흐름만 따라갈 뿐이다.

    거리 시위를 하던 중 '첫 총성'이 울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다. 카메라는 등장인물의 시선을 따라갈 뿐이기 때문에 누가, 어디서, 왜 처음 총을 격발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총성이 들릴 뿐이다. 그 결과는 위에서 묘사한 것처럼 잔혹했다. 첫 총성에 놀란 영국군은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고 비무장 시민들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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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여기서 영국군은 왜 동요하여 총을 쏘았을까? 첫 격발이 영국군의 것일 수도 있지만, 시위대의 것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 시위를 준비하면서 무장투쟁파인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의 음모를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기회를 타 총을 나눠주려는 의도를 은근히 내비치고 유혈 충돌을 내심 바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IRA는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무력집단이기 때문에 출동 대기하는 영국군들은 일말의 불안감에 휩싸였었다. "IRA가 총격전을 벌이는 걸까? 아니면 발포 명령이 떨어졌나?" 그 자리에 있는 군인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고,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그 사건이 종결된 후에 총을 든 시위대를 보지도 못했다며 패닉 상태에 빠져있던 한 군인은 시위대가 먼저 총격을 시작했다고 당연한 듯 말한다.

    이 정도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이제 관객은 의문에 빠진다. "왜 영화는 누가 처음 총격을 시작했는지 가르쳐주지 않을까?" 당황한 일개 군인의 실수일 수도 있고, 유혈 투쟁을 기대한 IRA의 음모일 수도 있다. 왜 영화는 그 판단의 단서조차 제공해주지 않고, 단지 '일발의 총성만 들려줄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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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보기에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나약한 개인과 그를 억압하는 사회 구조'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닌가 싶다. 그 특수한 상황 속에서라면 누구나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물론 그 선택에 있어서 개인의 편차는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을 쉽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IRA의 음모였다 할지라도,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는 IRA가 무고한 시민을 희생시켜 가면서 유혈 사태를 일으키고 싶었겠는가? '나약한 개인'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는 '첫 총성'의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는다.

    즉, 유혈 사태의 당사자에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유혈 사태를 불러일으킨 구조적 모순'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왜 아일랜드 시민은 시위를 나와야만 했고, 왜 영국 군인들은 방아쇠를 당겨야 했는가. 시민과 군인의 선과 악을 판단하는 건 의미가 없다. 이 유혈사태의 구조적, 근본적 원인은 북아일랜드의 자치권을 몰수하고 반(反)구교도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아일랜드의 여론에는 콧방귀도 끼지 않았던 영국의 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나약한 개인들을 앞세워 비극을 조장한 영국 정부에 이 유혈 사태의 책임을 추궁해야 하는 것이다.


    촛불 집회로 눈을 돌려보자. 6월 29일, 우리는 '피의 일요일'을 직접 목격했다. 수많은 시민이 전경의 무차별 진압에 희생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전,의경 측에서도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 유혈 충돌 이후에 벌어지는 논의의 대부분은 '누잘못했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촛불 집회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위대가 먼저 폭력적으로 나오니 거기에 맞게 강경 진압을 한 게 아니냐'는 식이고, 그에 대하여 촛불 집회 측은 '전,의경이 먼저 강경진압을 하니까 방어적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누가 먼저 때렸나. 누가 먼저 폭력을 사용하였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할 논리적 근거가 있기는 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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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영화 <블러디 선데이>로부터 이 유혈 충돌을 보는 관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 전, 의경을 욕하는 누구도 자신이 전, 의경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지금 순간이야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시위대의 입장은 더 안타깝다. 맨몸으로 전, 의경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무자비한 폭력이 쏟아지는데, 어떻게 무조건 '비폭력'만 외치고 있나. 머리는 '비폭력'을 외쳐도 어느새 몸은 정당방위를 위한 폭력을 자행하고 있을지 모른다. 주위에서 자기 부모님, 자기 자식, 자기 친구 같은 사람들이 맞아서 피가 흐르는데, 어떻게 진정하고 비폭력을 외치겠는가.

    전,의경도 시민도 '나약한 개인'일 뿐이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나약한 개인을 꼭 이렇게 잔혹한 현장으로 내밀어야 하는가. 이 유혈 사태의 근본적 모순은 바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과 태도'에 있다. 국민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한 지 불과 닷새째만에 이명박 정부는 강경 일변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루가 갈수록 가관이다. 시민들을 광장으로 나오게 만드는 것도, 전,의경의 심신에 고통을 가하며 가혹한 진압을 명령하는 것도 바로 '이명박 정부'이다.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시민들이 변질되었는지 말았는지를 논할 때가 아니라 이런 사태의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 '이명박 정부'를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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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 협상도 하고 했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비율만큼 촛불의 수도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많은 수의 촛불은 아직도 추가 협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수도 많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먹을 거리'에 대한 시민의 권리 요구는 결코 '민주화'에 뒤지지 않는다. 독재 정권를 타도하는 것 만큼 개개인의 건강권,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을 수호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 우리는 안전하지 못한 먹을 거리가 수입되는 것을 막지 못하는가?

    꼭 '광우병 문제'가 아니더라도, 국민을 좌빨, 친북단체, 폭도 등등으로 몰아가며 무자비한 진압을 강행하는 이명박 정부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안전한 음식 좀 먹자고 시청으로 나오는 사람들보다 이명박이 더 보호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이명박 정부는 영화 <블러디 선데이>의 결말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평화 거리 시위를 하던 아일랜드 청년들은 유혈 사태 이후에 무장투쟁파인 IRA로 달려가 총자루를 굳게 쥔다. 약세였던 IRA는 이 사건 이후에 급성장세를 보인다.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은 아직도 유효하다. 피는 피를 부른다. '비폭력'의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그 어느 쪽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되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데에 이명박 정부가 동참하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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