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한 꼬마가 있었고, 세월의 벽을 넘고 그가 사랑한 한나가 있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꼬마가 대신 책을 읽어주곤 했다. 그리고 여느 사랑처럼 그들은 부적절한 타이밍에 헤어졌고, 몇 년 뒤 유태인 수용소의 경비원이자 한 명의 전범으로서 재판장에 선 한나를 꼬마는 발견한다. 꼬마는 어떠한 이유로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고, 그녀는 감옥에서 조금은 부당한 20년을 보낸 뒤 자살한다. 남긴 유언장에는 그녀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죄의 말이 있었다. 수용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소녀에게 보내는. 그 사죄의 표시는 찻통에 든 7000 마르크였고, 그 소녀는 7000 마르크는 되돌려준 채 찻통을 받는다. 그 찻통을 전해주면서, 이제는 중년의 변호사가 된 그 꼬마도 한나와 자신을 용서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는 펑펑 울었다. 꺼이꺼이 운다는 게 어떤 건지 올해 들어 자주 경험하게 된다. '사랑'이 아니라 '용서' 때문에.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도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신발끈을 푸는 일처럼 용서도 당연해진다. 7000 마르크를 자신에게 넘겨주라고 했다는 한나의 유언에 어이없어 하던 소녀도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들을 보관하던 찻통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한나를 용서했다.

  짧은 내 인생에도 두 번의 용서가 있었다. 거대함이었던 사람에게 한 번, 따뜻함이었던 사람에게 한 번. (물론 나에게 그들을 용서할 권리가 있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나의 용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판단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나의 용서에 떳떳하다.)

  용서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었다. 용서를 했다고 생각해도 아직 온전히 용서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다. 용서는 참으로 꺼내기 무거웠다. 그렇지만 난 그의 눈물과 후회와 한탄을 봤고, 그녀의 어질러진 책상, 마구 던져진 가방, 금방 사온 빵이 담긴 봉지와 너무도 작은 손을 느꼈다. 참, 산다는 건 우습다. 사람은 찻통이나 빵처럼 별 거 아닌 것들에서도 다른 사람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체취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너무도 쉽게, 용서하게 만든다.

  여전히, 용서의 기억은 아프고 쓰다. 찻통을 받아들고 기운차게 뒤돌아서는 소녀는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그래, 당신도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대성통곡을 하게 만드는 게 용서인데... 

  그렇지만, 당신도 그렇게 당신답게 살아가야 하듯이, 나도 나답게 살아가야지... 용서의 기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또 한 번 나를 안아주는 것 뿐. 이 끝없는 바보스러움에 괴로워하는 나를, 나는 안아 줄 수 밖에 없다. 두 팔을 쫙 벌려서.